<김성의 관풍(觀風)> 한일 갈등 ‘프랑스·독일 화해협력조약’ 모델로 풀 수 없나

<김성의 관풍(觀風)> 한일 갈등 ‘프랑스·독일 화해협력조약’ 모델로 풀 수 없나

  • 기자명 김성
  • 입력 2019.07.11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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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했던 일이 터지고 말았다. 지난 1일 일본이 반도체 소재 등 3개 품목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역사교과서 왜곡문제로 한일 간에 갈등이 증폭된 일이 있었지만 경제적인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조치는 경제적 피해를 가져다준다는 점에서 과거와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점증하는 수출·수입 규제 … ‘경제전쟁’ 우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앞으로 고성능 소재들의 한국 수출 규제는 물론, 한국의 농수산물 수입도 규제하는 등 범위를 확대해 나갈 것이라는 예측도 있어 ‘경제 전쟁’ 수준으로 번지지 않을까 염려된다.

한국과 일본은 1천년이 넘는 역사·문화적 관계와 정치적 관계를 가져왔다. 삼국시대 이후 조선 중반기까지 일본은 한국의 문화수입국이었다. 조선시대에 우리는 일본에 20차례 통신사를 보냈고, 일본은 우리나라에 비슷한 성격의 사신을 70회 보내는 등 교류가 활발했었다. 일본의 전(前) 왕은 자신의 몸에 백제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관계가 깊었다.

그러나 정치적 관계는 악연(惡緣)의 연속이었다. 663년 일본땅의 백제계(百濟系)는 백제부흥군을 돕기 위해 2만7천명의 병력과 4백여척의 배를 백강구(白江口, 금강 하류)로 보냈으나 기상악화와 나당연합군의 공격으로 패했다. 그후 일본 백제계는 눈물을 흘리며 고향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일본은 1592년 국내 군사력을 분산하기 위해 임진왜란을 일으켰고, 19세기에는 한국보다 먼저 대외 개방으로 국력을 키운 뒤 1910년 한국을 병탄했다.

1945년 해방 이후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한-미-일을 공산주의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회의에서 일본을 패전국에서 동맹국으로 격상시켰다. 이 때문에 이승만 정권이 1949년 패전국 일본에게 요구하려고 만들어 둔 배상안은 물거품이 되었다. 한국이 전쟁에 빠져있는 동안 일본은 한국특수(特需)로 패전의 상처를 벗어나 경제대국 기틀을 다졌다, 미국의 권고로 1951년 10월 일본과의 한일협상에 들어가면서 우리는 일본에 22억 달러를 청구했다. 그러자 일본은 한국에 남겨둔 일본자산 46억달러를 내놓으라고 역제안하였다. 적반하장, 주객전도였다. 일본은 이후 한국의 완고한 지도자가 바꿔지기를 기다리며 ‘식민지 산업화론’ 등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섣부른 ‘한일협정’‘위안부 협정’이 논란의 불씨 남겨

1961년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은 한일협상을 산업화 재원 확보의 기회로 삼았다. 한국 정부는 징병·징용 피해자 1,032,684명에 대해 총3억6,400만 달러의 피해보상을 일본에 요구했다. 그리고 대학생과 국민의 반대 속에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을 체결하였다.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나 배상은 끝내 거절하고 ‘경제개발’ 지원비라는 명목으로 이듬해부터 무상 3억, 유상 2억, 상업차관 3억 달러 등 도합 8억 달러를 주었다. 한국 정부는 무상 자금 가운데 9.7%를 사망자 8,522명의 유족에게 30만원씩 나누어주었다. 보상은 그것뿐이었고 대부분 산업시설 건설에 투자됐다. 협상을 서두르다 보니 한국은 일본의 사과를 문서로 받아내지 못했고, 독도영유권, 한일어업협정, 피해자 생사확인, 사망자 유해 발굴, 원폭피해자, 징용 사할린 동포문제 등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화근이 되었다.

1991년 8월 14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학순 할머니가 기자회견 통해 새롭게 이를 공개했다. 일본정부는 2015년 12월 28일 한일 외무장관회담을 통해 한국이 설립한 재단에 10억엔을 지원함으로써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한국에 새로 들어선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요구에 따라 10억엔을 맡았던 재단을 해산했다.

한편 일본기업을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일본의 법원은 피해자에게 패소 판결을 내린 반면 한국의 대법원은 2018년 10과 11월 “국가의 청구권은 소멸되었지만 개인의 동의가 없었던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며 피해자에게 승소 판결을 내렸다. 피해자들은 한국 주재 해당 일본 기업 사무실 및 금융자산에 법률적 조치를 취했다.

“보상 완료됐다” vs “개인 청구권 남아있다” 대립

한국정부는 이 문제들을 일괄적으로 원만히 해결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기업들이 함께 기금을 조성하자고 제안했다. 반면, 일본은 1965년과 2015년 협정으로 피해보상이 완료됐다고 주장하며 제 3국에 조정위원회를 구성해 결론을 구하자고 했다. 두 나라는 모두 상대방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일본은 G20 국제회의가 끝나자마자 지난 1일부터 물리적으로 한국을 압박하기 시작한 것이다.

일본의 전술은 항상 국제적 상황을 이용해 왔다. 임진왜란 때는 명(明)나라를 꼬드겨 휴전협상을 펴면서 자국군(軍)이 한반도에서 무사히 탈출하도록 하였고, 1백년 전에는 청일전쟁, 러일전쟁, 미국과 가쓰라-테프트 조약 및 유럽들의 보장을 받은 뒤 한국을 강점했다. 한일협정도 일본이 패전국에서 동맹국으로 국격이 변경되고 다루기 힘들었던 이승만이 물러난 뒤 조약을 맺었고, 이번의 수출 규제책 발표도 G20 국제회의가 끝난 직후 이루어졌다. 일본은 보복조치를 취하고서도 한일협정위반과 관계가 “있다”“없다”로 왔다갔다하는가 하면 엉뚱하게 ‘안보문제 때문이다’ ‘특혜절차를 정상화 한 것일 뿐’이라고 얼버무리고 있다.

이러한 일본의 전통적 전략이나 한일협정의 흑역사를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궁금하다. 민간차원에서 불매운동을 외치고 있지만 3분의 1에 불과한 우리 경제규모에서 강대 강 대결로 해결책을 찾기 어렵다. 한일 갈등은 1천년이 넘는 역사가 쌓여 쉬 해결되기 어려운 과제이다. 역사적 관계와 정치적 해법, 두 트랙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1천년 넘어선 한일 갈등, 획기적인 대안 필요

서로 으르렁 대던 독일과 프랑스가 1963년 1월 22일 맺은 ‘프랑스·독일 화해협력조약’에서 해법을 찾아보았으면 한다. 한일갈등이 심해질 때마다 거론되곤 했던 이 조약은 보불전쟁과 1,2차 세계대전에서 적대관계였던 양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포괄적 괸계발전을 위해 외교·과학·문화·환경·교육 등 전반적인 분야에서의 협력관계를 규정했던 획기적인 조약으로 이후 외형적인 갈등은 사라졌다.

김성(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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