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눈뫼, 죽지 않고 소롯이 잠드는 곳

[유명옥의 샤머니즘 이야기] 눈뫼, 죽지 않고 소롯이 잠드는 곳

  • 기자명 데일리스포츠한국
  • 입력 2019.07.04 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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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한국] 주인공이 40일간 거주했던 불모지 ‘유리’라는 공간은 그 한자가 말해주듯이 ‘사람을 유인하고, 인도하는 마을’이다.

그 곳은 서른 세 살이었던 예수가 40일간 황야에서 고행한 장소와 대비되는 공간이다.

유리는 ‘습기를 그리워하기 시작하면 병’이 되고, 그 병이 시작되면 참기 어려워지는 형벌의 장소인 동시에 타인을 살해한 무거운 죄의식을 가진 자가 인고의 삶을 견디고, 승화해 내어야 만이 죄의 사함과 영혼의 구원을 받는 장소이다. 한국 샤머니즘의 저승이 죽음의 공간이자 치유의 공간이듯이.

운명의 덫에 걸린 주인공은 이 유리라는 공간에서 습득한 연금술을 통해 과거의 업(業) 속에 자신을 녹이고 정련한 후 현세를 신화로부터 ‘유리(遊離: 해체)’시켜야만 한다.

그러려면 그는 엄청난 “힘과 인내”를 발휘해야 하고, 유리는 이 과정을 통과해야 도달할 수 있는 ‘마른 늪’과도 같은 험난한 곳이다.

이 곳은 가슴에 불을 지피고는, 누구라도 사십일을 살기가 용이치는 않다. 사십 일을 살기 위해서는 아무튼 누구라도, 가슴의 불을 끄고, 헤매려는 미친 혼을 바랑 속에 처넣어, 일단은 노랗게 곰을 띄워내든가, 아니면 일단은 장례를 치러놓고 홀아비로 지나지 않으면 안 될지도 모른다.

주인공은 유리의 동구에서 “걷는 것으로 고행과 수도를 한다”고 자신을 소개하는데, 그것도 ‘타성에 의해서 그 진공 속을 몸 가지고 한없이 구르고 있는 듯이 보이는, 아흔 살은 되었음직한 한 떠돌이 중’을 만난다.

뫼비우스의 띠로 엮어진 원초적인 생의 뒤안길로 이어진 유리로 가는 행로의 초입에서 만난 그 중은 ‘떠나는 길’이었고, 그는 ‘떠들어가는 길’이었다.

그 늙은 중은 산 채 걸어가지를 않고, (자신의) 임종을 주인공에게 적나라하게 보여 준 것이었다. 나중에서 늙은 중의 죽음에 자신이 연류된 것을 깨달은 주인공은 늙은 중이 ‘근 백년 가까이 보류해왔던 죽음’을 “왜 하필이면 (자신의) 앞에서 치러 보여주었는가?”하는 의문을 가지며 스스로를 향한 분노를 토해했다.

하여, 삿갓 그늘 아래 반쯤 숨은, 그 늙은 대가리를 한번 되게 걷어 찼다. 그는 햇딱 한 번 뒤집어 진 늙은 중의 얼굴을 보며, 어쩐지 그 늙은 중의 얼굴이 자신의 ‘죽은 얼굴’이라는 것을 알았다. 늙은 중의 얼굴은 눈은 감고 있었으나 입엔 흙을 한입 물고 있었다. (계속)

※ 여기 연재되는 글은 필자 개인의 체험과 학술적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한 개인적 견해이며 특정 종교와 종교인 등과 논쟁이나 본지 편집방향과는 무관함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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