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국민이 함께 ‘문화재’ 지키는 義兵이 되자

<김성의 관풍(觀風)>국민이 함께 ‘문화재’ 지키는 義兵이 되자

  • 기자명 김성
  • 입력 2019.06.27 10:28
  • 수정 2019.06.2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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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4월 14일 부산진에 상륙한 왜군 주력인 고니시부대는 부산진과 동래를 점령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뒤 커다란 저항을 받지 않은 채 파죽지세로 북진하여 5월 3일 한양을 점령하였다. 조선땅에서 임진왜란을 일으킨지 단 20일만이었다. 그들은 살인과 방화, 약탈로 우리나라를 유린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고 있던 경상도의 성주사고(史庫)는 물론 충청도 충주사고, 한양의 춘추관도 불태웠다. 이제 남은 것은 전주사고뿐이었다. 더구나 여기에는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 모두 1322권이 남아있었다. 바로 옆 경기전에는 태조의 어진 등이 봉안되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을 지킨 지방의 선비들

5월 초, 왜군 일부가 남원을 거쳐 전주성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그대로 두면 전주사고도 잿더미가 될 판이었다. 그러나 왜군의 조총 소문으로 공포에 빠져 어느 누구하나 나서려 하지 않았다. 조선왕조의 기록이 완전히 사라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이때 자원해서 나선 지방의 유지들이 있었다. 정읍의 선비 안의(安義)와 손홍록(孫弘祿)은 위험을 무릅쓰고 가솔들을 데리고 전주사고로 달려갔다. 당시 안의는 64세, 손홍록은 56세의 노구였다. 이들은 전주사고에 보관되어 있던 실록 64 궤짝을 우마에 싣고 와 정읍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겼다. 이렇게 1차 보관을 마친 날이 6월 22일이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39일만이었으니 신속한 조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아 다시 더 깊은 산속인 은봉암, 비래암 등으로 옮겨가며 1593년 7월 9일까지 380여 일 동안을 지켰다. 그리고 매일의 상황을 ‘수직일기(守直日記)’에 작성하여 기록으로 남겼다. 조선왕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뒤 전주사고본을 바탕으로 ‘실록’을 복본(複本)하여 춘추관, 마니산,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 사고 등 좀 더 안전한 깊은 산중에 보관하게 됐다. 결국 ‘조선왕조실록’은 1997년에 훈민정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만약 안의와 손홍록이 없었더라면 오늘날 우리는 조선왕조의 ‘블랙박스’를 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군을 맨몸으로 막아낸 의병뿐만 아니라 ‘문화재 의병’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작전명령을 거부한 공군 대령과 경찰 총경

합천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을 지킨 의인도 있었다. 동족상잔의 참극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 12월 18일 미군으로부터 경남 합천 해인사를 폭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퇴패하던 인민군이 기지로 사용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이 지시를 받은 사람은 4기의 공군 편대를 지휘하던 편대장 김영환 대령이었다. 해인사에는 고려 고종때, 15년의 세월에 걸쳐 새겨놓은 81,258장의 고려대장경과 4,845매의 사간본(寺刊本)이 보존된 법보사찰이었다. 당시 전투기에는 네이팜탄과 로케트탄이 탑재되어 있었는데 네이팜탄 하나만 발사하더라도 해인사와 팔만대장경은 눈 깜짝할 사이에 잿더미로 변해 버릴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김영환 대령은 명령을 거부하고 해인사와 뚝 떨어진 곳에 기관총만 쏘았댔다. 31세의 김영환 대령은 명령 불복종죄로 미군 작전 사령부에 호출되었다. 김 대령은 이 자리에서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법보 사찰로 영국사람들이 말하기를 '영국의 대 문호, 세익스피어는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했다'는데 우리는 세익스피어와 인도를 다 주어도 해인사 팔만대장경과는 바꿀 수 없는 보물 중의 보물이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당당한 태도에 미군 작전 장교는 젊은 장교의 문화사랑에 감복하여 경례를 올렸다. 그러나 이 보고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은 노발대발하여 당장 사형을 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우여곡절 끝에 주변의 설득으로 그는 사형을 모면하였다 한다. 결국 팔만대장경은 젊은 영웅의 목숨을 건 결단으로 이제 세계문화유산으로 남아있게 되었다. 해인사 입구에는 그의 공덕비가 있다. “여기 화살같이 흐르는 짧은 생애에 불멸의 위업을 남기고 영원히 살아남은 영웅이 있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지리산 기슭에 자리잡은 구례 화엄사도 빨치산의 은신처로 활용될 것을 우려하여 사찰 전체에 대한 소각명령이 내려졌다. 작전을 책임맡은 전투경찰대장 차일혁 총경은 “절을 불태우는 데는 한나절이면 족하지만, 절이 오늘에 이르는 데는 천년이 걸렸다.”며 궁리 끝에 각황전 문짝만 떼어서 불을 질러 화엄사를 지켜냈다.

직지활자·하피첩도 민간인이 찾아내

보이지 않은 곳에서 우리 문화재를 지키거나 발굴한 민간인들도 적지 않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근무하던 박병선은 수장고에 있던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 문서가 1455년판 구텐베르크 성서보다 78년 앞선 1377년에 만들어진 금속활자본이라는 것을 확인하여 2001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도록 했다. 또 외규장각 의궤가 2011년 대여 형식으로 한국에 돌아오도록 했다. 다산 정약용이 부인의 치마에 글을 써 보냈다고 해서 유명한 하피첩도 한국전쟁때 분실되었다가 수원의 아파트에서 휴지를 줍던 할머니와 관리소장을 거쳐 2015년 국립민속박물관으로 넘어왔다. 쓸데없는 조각으로 소각장으로 가기 일보 직전에 살아난 것이다. (조상열 발표문에서 일부 발췌)

우리에게 이런 위인이 있었다는 게 무척 자랑스럽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수많은 문화재들이 일제 약탈로 아직도 외국땅을 떠돌고 있어 안타깝다. 국내의 의병활동, 독립운동 자료 등 문화재급 역사자료들도 장롱 속이나 창고에 방치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40년 전의 5·18도 감춰진 기록 때문에 아직도 진실을 찾아 헤매고 있다. 이제부터는 이런 자료들도 국민의 힘으로 모두 모아 우리의 역사를 다시 정리해야 한다.

‘문화재지킴의 날’ 참여해 역사복원 나서야

지난 6월 22일 정읍 내장산에서는 (사)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 회원 1천명과 문화재청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회 문화재지킴이날' 기념식을 가졌다. 이날은 임진왜란때 전주사고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실어날랐던 날이었기에 역사적 의미를 더했다. (사)한국문화재지킴이단체연합회(회장 조상열)는 이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는 운동을 펴 국민들의 문화재 사랑을 고취시키자고 했다.

오늘도 역사자료가 사라져 가고 있다. 이럴 때 국민 모두가 ‘문화재 의병’으로 나서서 자랑스러운 역사 한국을 만들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김성(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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