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가 우는 바다에서 해수욕하고, 쪽빛바다에서 낚시하고

모래가 우는 바다에서 해수욕하고, 쪽빛바다에서 낚시하고

  • 기자명 박상건 기자
  • 입력 2019.06.26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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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건의 섬과 등대여행] 42 신지도와 모황도

[데일리스포츠한국 박상건 기자] 우리나라 지도에서 육지의 최남단이 완도군이다. 완도읍 건너편 섬이 신지도이다. 신지도 사람들은 완도읍을 1일 생활권으로 삼는다. 완도읍과 신지도는 신지대교로 이어졌다. 과거 신지도 섬 안에서 배 시간에 맞춰 하루 세 번씩 오가던 시골버스 대신, 2006년부터는 완도읍 버스터미널에서 군내버스가 수시로 운행한다. 신지도 사람들은 배와 승용차를 편리한 방식대로 활용하고 있다.

명사십리 해수욕장
명사십리 해수욕장
신지대교
신지대교

우리나라에는 명사십리라는 이름의 해수욕장이 몇 군데 있다. 대개 ‘밝은 모래’라는 뜻이다. 그런데 신지도명사십리는 ‘모래가 운다’는 뜻의 ‘울 명’자를 쓴다. 4km에 조금 모자라는 3.8km 해변을 ‘십리’라는 단어를 합해 ‘명사십리’로 부르고 있다.

또박또박 백사장에 발자국을 찍으면서 걸어가 밀려오는 파도에 귀 기울이면, 영락없이 그 울음소리가 들린다. 모래와 모래 사이에서 울려오는 해조음은 모래가 우른 소리이거나 파도가 모래에 해금을 켜듯 신비의 울림을 켜는 소리이다. 백사장엔 해송 숲이 병풍을 치고 서 있다.

나는 신지대교가 개통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운항하는 도선을 타고 신지도로 간 적이 있다. 선장은 50년째 철부선을 항해 중이었다. 완도 토박이인 선장은 기상특보나 기상예보가 없던 그 시절에 낡은 목선을 항해하며 새벽에 완도항을 출발해 3개 군 단위 섬을 거쳐 11시간 항해 끝에 목포항에 도착했다는 험한 뱃길 이야기를 들려줬다. 당시 하루 한 척밖에 운행하지 않던 목선인 애환의 여객선, 이제 교통수단이 좋아져 하루 한 척 밖에 운행하지 않는다.

본디 완도항 항로는 경상도까지 이어졌지만, 남해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사라졌다. 선박이 버스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면서 생긴 애증의 모습이다. 그래도 느림의 미학을 즐기고 싶다면 철부선을 타볼 수 있다. 그렇게 건너간 신지해수욕장은 국토해양부와 해양수산부로부터 거의 매년 우수해수욕장으로 선정됐다.

노을 속 신지도
노을 속 신지도
신지도 명사십리해변 파도
신지도 명사십리해변 파도

신지도 해송 숲에는 ‘사랑의 텐트촌’이라는 야영캠프촌이 있다. 숲에서 야영하다가 햇볕에 몸을 그을리고 다시 깊은 물속에 잠기기를 반복한 후 햇볕을 쬔 부드러운 모래는 찜질로 그만이다. 마을사람들은 이 모래찜질을 이용해 오래 전부터 신경통, 관절염, 피부질환을 치료해왔다고 전했다. 그 입소문이 피서객들을 불러 모으는 데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바닷가에 주렁주렁 열린 가로등은 밤바다 해안선과 물빛으로 일렁이며 신지도와 완도항의 멋진 야경을 연출한다. 아주 이국적이다. 남해안 쪽빛바다, 그 다도해 야경의 진면목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한적한 해수욕장을 선호한다면 신지도 동쪽 동고리해수욕장으로 간다. 섬 뒤편에는 명사십리보다 수령이 더 오랜 울창한 솔숲에서 뿜어내는 송진 냄새가 갯바람과 어우러져 특이한 향기를 우려낸다. 신지도는 왜가리 서식지이기도 하다.

모황도 멸치 떼
모황도 멸치 떼

신지도와 모황도 사이 바다는 멸치어장이다. 강태공들에게 황금낚시터로 유명하다. 서해안 대표 어종인 감성돔, 우럭, 도다리, 광어, 농어 등이 많이 잡힌다. 섬으로 나가지 않아도 포구와 갯바위에서 손맛을 맛볼 수도 있다.

신지도와 모황도를 오가면서 그 해 여름 시인들과 함께 섬사랑시인학교 캠프를 열었다. 명사십리 밤바다에서 촛불을 켜고 시를 낭송하고 캠프파이어를 즐겼다. 다음 날은 다도해 감상 여행길에 나섰다. 신지도는 모황도, 달해도, 내룡도, 외룡도, 형제도, 갈마도, 혈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을 거느리고 출렁인다. 그 가운데 모황도는 완도 본섬에서 동남쪽으로 12㎞ 해상에 있다. 봄이면 먼 바다에서 바라 뵈는 섬의 기암괴석 사이에 핀 배추꽃이 노란 솜털 같다하여 뱃사람들은 모황도라 불렀다. 안개 낀 섬에 핀 노란 배추꽃도 꽤 장관이다.

신지 모황도
신지 모황도

모황도 앞 바다엔 형제도, 진섬 등 작은 무인도들이 서로 어깨 걸고 출렁인다. 모황도는 국유지인 무인도이다. 1999년까지 4가구 12명, 2003년 노부부가 살다가 모두 뭍으로 떠났다. 현재는 1가구 3명의 가족이 살고 있다.

이 섬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섬사랑시인학교 여름캠프 프로그램 중 무인도 낚시대회를 열던 섬이었다. 신지도 가인포구에서 그물을 털러 가는 어선을 타고 섬으로 건너갔다. 모황도 바다는 도미, 놀래미, 멸치 등 어족이 풍부하다. 황금어장으로 프로 낚시꾼들이 즐겨 찾는 섬이다. 멸치가 많이 잡혀 완도군은 이 일대를 낭장망어장지대로 지정했다. 낭장망은 조류가 빠른 곳에 설치하여 멸치를 잡는 어구를 말한다.

해안가에서 돔을 말리는 모습
해안가에서 돔을 말리는 모습

해안가에서 보면 2~3미터 깊이의 바다 밑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청정해역이다. 바위마다 따개비와 전복, 해삼 등도 즐비하다. 이 섬의 가장인 조양배 씨는 부산에서 23년간 타향살이를 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고기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고 갯바위에 소라 등을 채취하며 산다. 이따금 낚시꾼들 상대로 민박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무황도 유일한 학생은 조 씨의 늦동이 기흠이였다. 맞은 편 섬인 신지동초등학교로 매일 어선을 타고 오갔다. 아버지와 아들은 날마다 말동무가 되어 아름다운 동행을 했다. 고기를 잡으러 갈 때도 아버지가 키를 잡고 아들은 닺을 캔다. 초등학생이지만 그 손놀림이 능수능란했다.

낚시를 하던 중 이성부 시인이 우럭 한 마리를 낚아 올린 후 갑판에 자꾸 고기를 놓치자 아가미를 눌러 잡아 올리며 “선생님들, 저를 잘 보랑께요? 우럭은 몸통을 잡는 것이 아니랑께요. 이렇게 아가미를 살짝 누르면 된당께요”라며 씩 웃었다. 기흠이의 꿈은 가수였다. 녀석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한 곡조를 뽑았다. 우리는 뱃노래를 함께 불렀다. 억척스럽지 않고서는 생활하기 어려운 섬 생활에서 바다를 두려워하지 않고 푸른 파도처럼 살아가던 섬 소년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캠프가 끝나고 서울로 올라와 그 맑고 밝은 모습이 자꾸 어른거렸다. 우리 일행은 소년과 인근 섬 아이들 20명을 서울로 초청했다. 소년의 꿈은 방송무대에 서고 싶은 것이었다. 그래서 방송국 견학부터 갔다. 연예인과 기념촬영, 생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부모님께 안부인사도 하고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하고 마침내 노래경연 프로그램에 참여해 ‘섬 소년 트로트 가수’로 대서특필됐다. 이제 성인이 된 그는 넉넉히 그 꿈을 이뤄 유명인사가 됐다. 그 섬이 그립다.

방죽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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