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칼럼> 몇 개의 글을 읽고 몇 개의 생각을 하고 한 개의 글을 쓰다

<정윤천 칼럼> 몇 개의 글을 읽고 몇 개의 생각을 하고 한 개의 글을 쓰다

  • 기자명 정윤천
  • 입력 2019.06.2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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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는 날이었다. 모처럼 서점엘 갔다. 김훈의 근간 한 권을 손에 들고 그 도시를 빠져나와 시골로 돌아왔다. 서점에 간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김훈의 수상집과 함께 오게 되었다. 그새 피사의 사탑들처럼 늘어난 시멘트 기둥(고층 아파트)들이 자꾸만 하늘을 가려 보이고 있었다. 흐리고 탁한 하늘이었다. 인구는 줄어 가는데 늘어만 가는 집들이 궁금했다. 하루도 쉬지 않고 도로를 내고 집을 늘려가는 지금의 방식들이 궁금했다. 누가 저 집에 들어서 살고 누가 저 새로 난 길을 따라 달리려는지, 이 땅 위에서의 앞으로의 일들이 빗물에 섞여 비릿해져 오는 것 같았다.

“역사가 기록이 아니라 풍경과 표정으로 남아 있는 곳이 있는데, 남해 이락사와 남한산성 서문이 그곳이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 관음포에서 전사했다. 그가 전사하던 날 7년간의 전쟁은 끝이 났다. 이락사는 그의 순국 234년 후에 관음포 순국현장에 세워진 사당이다. 이락사는 이가 떨어진 자리의 사당이라는 뜻이다. 주어 한 글자와 동사 한 글자만으로 구성된 이 차가운 문장은 너무도 무정해서 나는 이락사 현판을 볼 때마다 진저리친다. 이락은 물리적이다. 이락은 이 무정한 두 글자로 충, 열, 진, 무 같은 커다란 문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장엄한 슬픔의 뼈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차가운 문장 속에서 슬픔은 침묵으로 가라앉아 있다. 이락사는 오래된 소나무 숲에 자리 잡은 작은 사당이다. (중략) 1598년의 겨울 바다였다. 숨을 거둘 때 이는 말했다. 지금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내지말라.

남한산성 서문은 산성의 4개 문 중에서 가장 초라하다. 높이가 낮아서 말을 타고 지나갈 수가 없다. (중략) 서문에서 삼전도까지 걸어갈 때 조선 임금의 내면은 어떠했는지를 생각하는 일은 참혹하다. // (중략) 나는 남한산성에 갈 때마다 이 돌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 이 돌은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혀있음으로써 어떤 표정에 도달하는데, 그 드러남의 표정은 무표정이다. 거기에는 이락의 두 글자조차 없다. " <김훈'연필로 쓰기' 중에서>

슬픈 장면을 돌파한 글은 이상하게도 기쁘거나 충일한 곳의 언저리에 기댄 글보다 더 깊은 데를 참견한다. 두 역사의 현장에서 일찍이 김훈은 소설가로서의 한 평면을 닦아 내었다. 가히 찬연한 슬픔의 복원이기도 하였다. 어느 식자연들은 김훈의 문장에 어린 얼음무늬에게로 ‘비문’의 혐의를 씌워 자신의 식견에 빛을 더하려는 논조들도 일부 보아 왔다. 그러려니 완당의 글씨체인들 정법에서 벗어나기는 한 가지가 아니었으랴. 금생에서 후세까지라도 완당 체와 김훈 글발은 사실은 그들만이 열어 놓은 한 신생의 평원이었다. 이런 말을 하지는 게 아니었다. 그렇게 한 개의 글을 읽었다. 내가 관계되어 있는 세상에서의 어느 곡진한 시공의 재현이었다. 그러려니 나는 남의 글 속에서 나의 이생의 먼 데를 추억하여 보았다. 이락사와 패국의 서문은 이미 그가 다 들여다보아 버렸으므로 새삼 찾아가보고 싶은 대상은 아닐 것 같았다.

아침에는 전화기의 액정 위에 뜬 글 한 줄을 한사코 늘여서 마지막까지 읽었는데, 저녁에는 지워져 버리고 없었다. 성락이라던가 성골이라던가 이름 앞에 하필 성자가 붙어있던 한 교회의 목사는 한 달 새경이 수 천 만원에 이른다는데, 그 교회의 풀을 깍고 쓰레기를 치우고 밥을 하고 빨래를 해오던 수 십의 일꾼들에겐 도무지 봉급을 주지 않아 노조를 짓고 농성을 벌이는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김훈의 문장보다 가련한 지경을 내보이며 있었는데, 가슴으로는 한 줄기 미풍도 일렁이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한 시인의 시구가 생각났다. ‘하느님과 새떼들도 떠나가 버린 우리들의 도시여’ <김준태 시인의 시에서>

전시가 아닌데도 우리들의 시정에는 참상이 가득했다. 이 참상의 포연 속을 가로 지르는 말의 폭탄들. 그들의 말 꼬리들 마다에는 뾰족한 핵탄두들이 장착되어 있었다. 그렇게 참상과 참상들이 어울려 조화지경의 경치를 자아내며 있었다. 이 참상의 여름이 깊어가고 이내 참상의 가을이 오면 참상의 씨앗들과 과실들이 호빵처럼 고구마처럼 익어갈 것 같았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이곳으로는 겨울에도 눈이 내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새벽에 밴드에서 시를 읽었다. 무리 중에 통영의 지척에 사는 이의 언중유골이 판옥선 지붕을 이루던 판지들 마냥 촘촘하여 보였다. 제목이 번번이 외지에서 건너와 따라붙는 까닭이 이 자의 한계이자 극복이어야 할 것 같았다. 지척의 감회로도 얼마든지 멀리 갈 수 있었다. 한 자 앞의 방문 밖에도 설산을 건너온 계절들이 살고 지냈으므로. 난시풍의 시들은 짧은 다리에도 치마에만 성화인 듯싶었다. 어느 균형 없이 짧은 치마에서는 노 팬티의 샅 언저리가 얼찐거리기도 하였다. 혼자서 벼린 주머니 칼날로 고투대신 전투 대신 초식들로만 주구장천이었거나 망건 찾다가 장 넘어간 일장춘몽인들 흔했다. 현란해 보였으나 장엄바다의 물결 앞으로는 멀어 보였다. 내게서는 통영이라는 바다의 이름도 그렇게 마땅하지는 않아 보였다. 통영이라 쓰고 나폴리로 읽는 시인이거나 아전 부스러기들도 있었다. 전터가 붉거나 극명하여 보이지 않았던 까닭으로는 그 바다의 현실적인 물빛 때문일 것도 같았다. 더러는 지붕 낮은 집들의 저녁에서 날려 올리는 전서구들 같았던 불빛들 때문일 수도 있어 보였다. 그렇다고 통영을 불화살의 끝으로 겨냥하거나 아름답지도 않은 마음으로 건너보라는 파발도 어쩌면 시의 소치는 아닐 것도 같았다. 간신 모리배들의 득세가 시의 배후에도 진을 이루는 징후는 있어 왔으니, 이제 곧 큰 시인이 하나 백척간두의 절벽에서 태어날 때가 가까워 오는 것 같기는 하였다. 풍우와 우사인들 잘 먹여 벼려 놓고서 조정에서 불러도 가지 않는 배포여야 할 것 같았다. 우리끼리 함께 기픈 시름이면 될 것 같았다.// 내가 살고 있는 어느 전터는 통영보다 기실 외따로운 데 있었다. 마음의 먼 임지에 한량의 풍차를 세워 놓고 돌아와 오래 전의 노질소리 끝에서 날려 보낸 화살 촉 하나는 적장의 목비알에 가 박혔던 쾌재의 순간처럼 풍차의 날개 끝에 올라서서 어쩌면 통영의 대낮 물빛 같은 까닭없는 한참을 들여다보기로는 하고 싶었다.// 갈대들이 키를 자라서 뒤덮는 이 난시의 변방// 당신들 하고도 멀리 떨어진 도고면의 입구에서 나는 내게로 닥쳐온 이 전쟁의 이름에게로 “도고면이 아름다운 이유 백 가지” 따위로 정하여 놓았기로서니.// 이제야말로 여기가 나의 통영이자 전터였음에 확연하였다. 찔레꽃처럼 붉은 전장의 아침이었으며, 저녁이 오더라도 마땅히 초병의 나날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략) <졸시 '도고면이 아름다운 이유 백 가지' 서문>

그렇게 전쟁에라도 임하듯이, 나는 한 동안 '도고면이 아름다운 이유 백 가지'를 찾아 나서볼 요량이었다.

정윤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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