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천 칼럼> 그러나, 그려보는 초승의 달

<정윤천 칼럼> 그러나, 그려보는 초승의 달

  • 기자명 정윤천
  • 입력 2019.05.30 10:43
  • 수정 2019.05.30 13:53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그가 나의 손을 놓고 가버렸을 때 저녁이 왔고 걸어서 길에 도착할 시각에 초승달이 졌다/ 어둠이 내리고 고요가 쌓여가는 동안 능선 아래의 칠흑과 능선 위의 푸르스름함을 보았다/ 오래 서서 ‘저 능선 굴곡 따라 난 걸어왔어’라고 외쳐본들 역시 혼자다/ 밤새 안개는 뒤척이고 숲은 축축하고 나무는 잎을 키우며 허리가 휘었지만 별들은 제 길을 무사히 지나갔다/ 만날 수 없거나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미련과 호기심과 서운함을 달랠 사이도 없이 새벽이 왔다/ 아침 동산을 보면 태양보다 숨은 초승달이 먼저 눈에 그려진다.

박노식의 시(초승달) 전문

왕년의 영화배우와 이름이 같은 박노식 시인은 전라도 광주에 식솔들을 부려놓고 이즈음은 한천면의 ‘전원주택’에서 반쓰봉에 난닝구 차림으로 지낸다. 본격적인 자연인이다 풍도 아니고 그렇다고 호사가 다마일 것 같은 전원 생활가 배역도 아니다. 부스스 일어나서 눈곱 낀 눈으로 천문도 풍수도 고려할 바 없는 그저 밥이나 나물 같은 시를 구하며 지낸다. 젊은 날의 머리숱과 총기를 간단없이 소모시켰던 대부분의 이유는 “시”에게로 있었다고 하였다. 가장의 의무이거나 책임 노릇을 어지간히 마쳤다는 생각이 들었던 적에. 그는 “저 능선 굴곡을 따라” 지금의 골짜기에 숨어들어 왔다. 거기가 그에겐 천도 복숭아밭이었고 유토피아인 셈이었다. 얼마 전에 발간된 자신의 두 번째 시집을 부러 내 거처까지 찾아와 놓고 갔다. “잘 썼는가 꼭 봐주쇼”가 누옥까지 찾아온 이유의 전부였다. 그렇게 그는 아직까지는 유명 시인도 아니고 소위 ‘전국구’도 아닌 시골문사 중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늦게 내지른 도둑질이니 일정부분 감당해야할 세월이 있어야만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시에는 “안개는 뒤척이고 숲은 축축하고 나무는 휘었지만 별들은 제 길을 무사히” 지나갔음을 일러주는 일대가관일 수도 있어 보이는 파수병의 눈매가 희번덕거려 주고는 하였다. 천상 시인의 눈알과 가슴의 계곡을 지닌 종으로 여겨졌음이다.

그보다는 옆도 뒤도 없이 앞만 보고 날뛰는 장갑차나 탱크들의 ‘캐더필더‘와도 같은 시절에. 박노식이만 같은 마음속의 요정이거나 차림새가 부실한 늙은 왕자(?)를 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귀한 일이 되어 다가오는 것 같았다.

언젠가 필자는 시나 시인들과 관계되는 자리에서 “우리들이 쓰는 모든 시는 우리들의 등 뒤에 있다”라는 논지로 한바탕의 썰을 풀어헤친 적이 있었다. 이 글의 원고를 수습하는 아침 시각부터서도. 소위, 국민들이 알지 않아도 되는 권리를 무자비하게 침탈하는 ‘뉴스’들의 쟁탈전은 노무현 기념관의 게시물에게로 정신적인 ‘빨갱이’들이 난입하여 기록물들을 훼손하였다는 소식을 전해주고 또 전해주고 있었다. 필자의 감식안에 따르면, 이럴 때의 노무현은 바로 우리들의 등 뒤에서 지내는 산물이며, 저 철딱서니 처신의 뽈갱이 새깽이들이 저지르고 도망친 행악은 눈앞의 ‘캐더필더’들이라는 구별이었다. 그렇게 별도 달도 강물의 얼굴 위에 서려있는 물낯들의 반짝임들도 모두 다 우리들의 등 뒤에 자리하고 있었다. 시는 마땅히 고개를 꺽거나 돌려 세우고 거기 서있는 우리들의 등 뒤에게로 고해보거나 그것들을 불러내어 저마다의 의미를 구현해야 할 책무가 있었으리라는 다짐이었다. 어쩜 박노식의 시들과 그가 두고 간 한 권의 시집이 또한 쓸쓸하지만 아름다운 표정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어 보여주었다.

지금도 시를 쓰며 지내는 골동품들의 물목에 부디 박노식의 이름 석 자도 제 명판을 얹는 날을 축원하여 주고는 싶어졌음이었다.

그렇게는, 빛나는 뒤와의 마주침 속에서 뜻밖의 시들은 슬며시 제 문을 열어준다. 열어주고는 들어오라고 손짓하여 주기도 한다. 사람들은 가끔 그래서인지. 어쩔 수 없이 시를 마주치거나 바라보아야 하는 일도 있었다. 더 이상의 대안이 없어 졌을 때, 죽을 듯이 옆과 앞을 무너뜨리고 자빠뜨리고 헤치고 베이고 넘어뜨리며 달려 왔는데도 도대체 생의 허기와 갈증이 가시지 않았을 때. 우리들도 시골 서생 박노식이 처럼 한 편의 시 속으로 귀의를 청해보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쓰지 않고도 발표하지 않고도 시집으로까지 옮겨내어 손에 들고 찾아오지 않고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아침의 동산에 오른 태양의 등 뒤에서 지난밤의 “초승달”의 이마와 눈매를 떠올려보면, 마침내 우리들도 시인의 마음이 되었던 것이다. 고적하고 쓸쓸한 한 사람의 시골 시인을 이 지면으로 불러낸 까닭이 어쩌면 그렇게 비롯되었을지 모른다.

주운/ 감꽃을 기워/ 목걸이를/ 만들었던 데/ 그네 집/ 마루에/ 놓고 올까/ 일백한 편도 넘었던/ 시를/ 심쿵생쿵 주워 모아는/ 보았던 데,

졸시 <감꽃을 주었던 데>

필자 역시 까마득하게 머언 등 뒤의 ‘초승’의 그림자 하나를 소환하여 짤막한 소품의 시한 편을 적어 보게 되었다. 시의 언술들이 비록 현란하지 않아도 도서관에 틀어박힌 고졸한 체계와 세계의 책들의 페이지며 명장면들을 들추어내려 하지 않고도 신화와 외래의 문명들과 지명을 거명하지 않고도, 마음의 어느 알맞은 처소와 행간에 위치한 ‘각별함’들을 일별하는 사실이었다는 사실을 전해보려고 한다.

시골 시인 박노식의 시에서 발화된 한 아침의 서정 속에서 필자는 다시 한번 시의 효용과 시심에 대하여 돌이켜 보게 되었다.

며칠, 남쪽으로 내려가 오랜 벗을 보내고 집을 비웠다/ 바지허리가 헌 포대 같이 헐거워졌다// 돌아와서 모든 창문을 연다/ 새벽이슬이 들어와 술잔이 차갑다// 깊은 곳으로 내려가 두꺼운 이불 덮었으니 한데서 오래 머물던 그의 얼굴과 손발도 포근하리라// 소쩍새 울음이 그치고 앞산이 텅 비어서 이제 누가 울어주나// 그가 나의 방에 들어와 한 계절을 난다.

박노식의 시 <나의 방>

그대들도 그대의 방 안에 찾아와서 그대와 함께 누워주고 일어나 주는 혼령처럼 깊은 슬픔이거나 기쁨이 함께 하는지 들여다보시기를.

정윤천(시인)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키워드
#정윤천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