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판] 화제의 책- 청빈의 사상(나카노 고지)

[출판] 화제의 책- 청빈의 사상(나카노 고지)

  • 기자명 박상건 기자
  • 입력 2019.05.17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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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은 가난이 아니라 간소한 삶, 바다출판사 출간

[데일리스포츠한국 박상건 기자] 금주 화제의 책과 새로 나온 책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번 주 독자들의 입맛을 당기는 책들로 '청빈의 사상' 그리고 시리아 난민과 미국인 소년의 우정, 아버지의 삶이 아들에게 유전되는 모습,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성장과정, 위대한 작가 재능은 모친에서 나온다, 함석헌 김대중 등 인권변호사 한승헌이 만난 사람들, 아날로그 매체의 특징 등을 다룬 책들을 화제의 신간으로 소개한다. 먼저 [화제의 책]으로 '청빈의 사상'을 소개한다.

청빈의 사상
청빈의 사상

[화제의 책]

△ 청빈의 사상(나카노 고지, 바다출판사, 302쪽)

이 책은 일본의 유명한 옛 시인(사이교, 바쇼, 료칸), 문인(겐코, 조메이), 화가(다이가, 부손)들의 가난하지만 맑고 아름다웠던 삶을 통해 지금은 잊혀진 ‘청빈’의 전통을 돌아보고 있다. 저자는 ‘청빈’이란 단순히 가난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선택하는 간소한 삶이며, 소유의 욕망을 최소화함으로써 거꾸로 내면의 자유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역설의 사상이라고 이야기한다.

온갖 물건의 소비와 소유로도 채워지지 않는 삶의 공허를 느끼는 현대인에게, 청빈한 옛사람들의 훈훈하고 감동적인 일화들은 더 적게 가짐으로써 더 풍요롭게 누리는 삶이 어떻게 가능한지, 더 여유롭고 의미 있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보게 한다.

예로부터 한중일 지식인들에게 이상적인 삶의 모습은 바로 ‘청빈(淸貧)’이었다. 일본에서 청빈의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초반. 거품 경제가 꺼지고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불황이 시작되던 1992년에 작가이자 평론가인 나카노 고지는 현대의 물질 만능 풍조 대안으로 옛 선인들의 소박한 삶을 재조명한 ‘청빈의 사상’을 출간해 선풍적인 관심을 모았다.

나팔꽃시렁납량도(구스미 모리카게)
나팔꽃시렁납량도(구스미 모리카게)

현대의 물질만능 풍조에 대한 대안으로서 옛사람들의 소박한 삶을 재조명한 책이 실의에 빠진 일본인의 마음을 위로했다. 나중에 저자는 “생각지도 않게 베스트셀러 따위가 되었다. 어째서 내가 이런 터무니없는 재난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라고 한탄했다고 한다. 청빈을 이야기해 원치 않은 부와 명성을 얻은 셈이니 세상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당대의 이 베스트셀러는 옛 시인 마쓰오 바쇼, 문인 가모노 조메이, 화가 요사 부손 등 문학사와 예술사 거장들의 일화와 글을 통해 청빈의 삶이 안기는 기쁨과 홀가분함을 일깨워줬다. 나아가 인도 철학, 성 프란치스코, 에리히 프롬 등의 이론으로 청빈 사상의 가치와 효용을 뒷받침했다.

초판이 나온 지 27년이 지난 지금, 디지털 일본어판 ‘브리태니커 사전’에 색인 항목으로 등재되어 있을 만큼 어엿한 고전의 반열에 오른 ‘청빈의 사상’은 출간 이듬해 우리나라에도 소개되어 많은 독자의 사랑을 받았으나 오랫동안 절판되어 많은 이들이 아쉬워했다.

이번에 나온 새 번역본은 일본 고전문학 전공자 김소영 선생이 원문을 충실히 옮기고, 저자의 꾸밈없고 단단한 문장의 멋을 잘 살렸으며, 특히 이 책의 백미라 할 일본 고전 시가들의 고졸하고 진솔한 시정을 충실히 담아냈다.

이 책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낯설지 않다. 우리에게도 청빈을 존중해온 오랜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선비사상이 바로 그렇다. 간소한 삶을 스스로 선택한 선비들은 명리와 빈천을 떠나 자연, 예술, 인생이 혼연일체가 된 풍류의 삼매경을 일상에서 즐겼다. 하지만 청빈의 전통, 선비적 가치관은 현대 사회가 성장과 소비 등 물질적 가치를 향해 질주하면서 폄하되고 잊혔다. 유형 가치에 매몰되다시피 한 이 시대에 무형가치의 소중함을 다시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에서 감동적인 대표적 사례를 보면, 임종 즈음 사세구(임종시)를 남겨달라는 제자들의 부탁에 “살아생전 지은 한 구 한 구 사세구 아닌 것이 없다”는 바쇼의 말이나, 아이들과 공놀이하는 료칸을 철없다고 나무라는 행인에게 다만 고개 숙이고 아무 말 하지 않는다는 시구나, 방탕한 조카에게 따끔한 훈계를 하는 대신 조카가 신발끈을 묶어주는 사이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 등은 흔치 않은 감동을 자아낸다.

또한 늦은 밤 깜빡 잊고 간 그림 도구를 서둘러 가져다준 아내에게 “뉘신지 모르겠으나 큰 신세를 졌습니다”라고 한 다이가와 이에 아무 말 없이 돌아온 교쿠란의 속 깊은 반응, 빗물이 새고 이가 들끓는 아케미의 초옥을 방문해 깜짝 놀라고 돌아와 “내 집에는 만권의 책도 쌓여 있지 않고 마음은 춥고 가난하여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고 적은 영주 슌가쿠의 고백 등은 상상만으로도 훈훈하다.

야색누대도( 요사 부손)
야색누대도( 요사 부손)

그리고 불시에 찾아오는 죽음 앞에 생의 덧없음을 도도히 말하다가 불현듯 “죽음이 싫다면 삶을 사랑해야지. 살아 있음의 기쁨, 날마다 즐기지 않으려나”라고 산뜻하게 전환하는 겐코의 문장을 만나면 뒤통수를 맞은 듯 얼얼해진다.

옛사람들이 전하는 청빈의 사상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칸트의 “하늘에는 빛나는 별, 땅에는 마음의 율법”이라 하겠다. 이 책의 모든 인물은 마음속 그 하나(도가 됐든 미가 됐든)를 발견하고자 외길을 걸은 사람들이다. 그것에 비하면 물욕도, 부귀공명도 보잘것없기에 초연할 수 있었으리라. 어쩌면 청빈은 그 마음 하나의 부산물일지 모른다. 심플 라이프의 요체를 간명하게 표현한 워즈워스의 명구 “생활은 간소하게, 생각은 고상하게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는 거꾸로 읽어야 한다. 생각이 너무나 높았기에, 기꺼이(혹은 필연적으로) 낮게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기에 저자의 결론에 우리는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산다는 것은 숫자를 더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일정표를 분 단위로 쪼개어 빽빽이 채워놓는다고 해서 그것이 삶의 충만함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유를 아무리 늘려도, 그것을 아무리 더해보아도 삶의 충실함은 얻을 수 없다. 인생은 더하기가 아니다. 만약 당신이 진짜 삶을 살고자 한다면 당신을 꽁꽁 얽어매어 구속하고 있는 소유관계에서 우선 심신을 빼내어보라. 완전한 무소유의 몸으로 천지와 마주해보라. 시계의 시간을 벗어나 영원한 지금의 여기를 차분히 음미해보라. 만약 그때 허공 속에 활연히 열리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당신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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