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그림찾기] 작가 허정호 ‘큰 채워짐은 텅 빈 것과 같다’

[숨은그림찾기] 작가 허정호 ‘큰 채워짐은 텅 빈 것과 같다’

  • 기자명 유승철 기자
  • 입력 2019.05.10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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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도, 116.8X116.8, Acrylic ink on canvas, 2019
문자도, 116.8X116.8, Acrylic ink on canvas, 2019

[데일리스포츠한국 유승철 기자] 허정호의 문자도는 한글이나 영문자로 구성된 단어나 문장이 선과 면의 요소를 대체한 작품이다. 거대한 화면을 깨알 같은 글자로 채워가는 작업방식은 편집광적인 기질과 인내 없이는 불가능해 보인다.

작가는 매일 대부분의 시간을 바늘처럼 세밀한 펜을 들고 반복과 나열의 과정을 통해 문자를 빚는다.

작가의 극사실적 묘사력은 작품에 회화성을 축소시키는 요인으로 지적될 수도 있을 정도로 치밀하다. 완벽을 지향하는 작가의 성품이 문자도와 결합되면서 독자적인 조형 방식과 이념이 만들어졌다.

허정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미학적 의미는 ‘채우기와 비우기 사이의 간극’이다. 작가가 선택한 항아리는 채움과 비움의 동시적 의미를 내포하는 사물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항아리는 채움의 기능을 위해 만들어진 그릇이면서도 비어있음을 본질로 삼는 존재물이다. 항아리의 빈 공간은 채움의 기억을 간직한 공간이고, 비어있음이 드러내는 충만감을 발견하게 되는 철학적 공간이 될 가능성을 지닌다. 회화 작품으로서 허정호의 항아리 그림은 이러한 인식론적 명제를 구체적 이미지로 드러내기 위한 시각적 장치들을 필요로 하게 되는데 그 면면은 다음과 같이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문자도, 116.8X80, Acrylic ink on canvas, 2019
문자도, 116.8X80, Acrylic ink on canvas, 2019

우선 작가는 항아리의 형태를 배경으로부터 명확히 분리시키기를 원치 않는다. 이를 위해 작가는 항아리 자체의 입체감을 나타내는 명암의 대비효과를 최소화 시키려 노력하고 있다. 이는 이미지와 배경의 관계를 소극적으로 처리해 항아리의 물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달리 말해 화면에서 바탕과 항아리의 관계를 평면적으로 처리하여 항아리 표면에 새겨진 문양의 이미지를 부각시키려는 의도의 결과다.

허정호의 작업실 한 벽면에는 노자의 도덕경에서 발췌한 ‘대영약충(大盈若沖)’이란 구절이 붙어있다. ‘큰 채워짐은 텅 빈 것과 같다’는 의미의 이 고사성어는 그가 항아리를 그림의 소재로 선택한 이유와, 거대한 화면을 채움과 비움의 사상이 교차하는 인식의 터로 만들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단서이다. 실상 그림의 장구한 역사는 화면에 어떤 것을 채우거나 비워내는 과정의 역사였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언뜻 보기에 여느 그림과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작가가 건네는 돋보기로 이미지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통을 넘어선 독자성이 감흥을 새롭게 한다.

작가 허정호
작가 허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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