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 8세 소년의 눈에 비친 섬지방 3·1운동

<김성의 관풍(觀風)> 8세 소년의 눈에 비친 섬지방 3·1운동

  • 기자명 김성
  • 입력 2019.04.26 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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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한국의 맨 남쪽 섬 전남 완도군 고금도에서 일어났던 3·1운동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독립투사였던 고 이기홍 선생이 8살 때 겪었던 3·1운동 이야기를 유고집 『내가 사랑한 민족, 나를 외면한 나라』에 남겼다. 매우 사실적이어서 백마디 설명보다 그의 증언이 당시를 쉽게 그려볼 수 있어 좀 길더라도 요약해서 인용한다.

한반도 최남단 완도 고금면의 3·1운동

“종갓집 당숙뻘이었던 청년 이현열은 나와 열두살이었던 종형을 따로따로 문방구에 보내 창호지 10매씩을 여러 번에 걸쳐 사오라고 했다. 내가 신나게 심부름을 하면서 사 왔던 창호지가 50매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또 무슨 용도인지도 모르고 종이와 물감도 사왔다. 어느 날 오후 6시경 당숙은 나와 종형 등 또래의 아이들을 불렀다. 부리나케 종갓집 사랑방으로 달려갔다. 사랑방에서는 이미 어른 여러 분이 종이와 물감으로 무언가를 만들고 있었다. (자세한 태극기 제작 묘사는 생략) … 다 완성된 태극기는 나와 누이동생이 뒤뜰로 가져가 멍석 위에 널어 건조시켰다. 뒷마루에서는 고모님과 누이 한 분, 종형이 미리 준비해온 여죽의 깃대에 풀로 한 쪽을 붙인 뒤 다시 멍석에 널었다. 이 작업은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수백개의 태극기가 만들어졌다. 내가 태극기의 실제 모습을 본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출입문밖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당숙과 어른들은 잘 건조된 태극기 서른 개씩을 백지에 말아 각각 포장하였다. 그리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이 장면을 신기하게 생각하면서 떨리는 마음으로 지켜보았다.

경찰과 숨바꼭질하며 “독립만세” 외쳐

다음날, 고모님이 보통학교에 놀러 가자며 내 손을 붙잡았다. 집에서 3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이었다. 보통학교 근처에 도착하니 거리가 심상치 않았다. 주재소 순사부장과 조선인 순사 2명, 주재소와 친근한 의용소방대원 등이 지나는 사람들에게 “어디 가냐, 가지고 온 물건들을 풀어 보여라”며 검문을 하고 있었다. 고모는 여자였으므로 소지품 검사 없이 그대로 학교 앞까지 갈 수 있었다. 고모는 학교 뒤편의 조금 높은 지대로 나를 이끌었다. 사방이 잘 보이는 트인 곳이었다. 학교 뒤에는 고금면에서 가장 높은 해발 400미터 가량의 덕암산이 있었다. 당시 도서지방에는 어디든 숲이 우거져 있었고 산 속에 사람들의 왕래가 많지 않아서 멀리서도 눈에 띠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덕암산 꼭대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외침은 끊이지 않고 들려왔다. 아주 멀리서도 생생히 들릴만큼 작지 않은 소리였다. 산 속이므로 전체가 얼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수백 명이 만세 합창을 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였다. 고모와 나는 산 정상으로 향한 눈을 떼지 못하고 거기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상황을 직감한 경찰 두 명과 그들과 가까웠던 민간인 두 명이 빨리 내려오라고 고함을 질러대며 정상을 향해 달려갔다, 그 사이 산 위에서 만세를 불렀던 사람들은 경찰들이 올라오던 길과 다른 길로 내려와 사람들이 모여있는 읍내로 돌아왔다. 만세시위를 주동한 인물 중의 하나인 정학균 선생과 당숙인 이현열 선생이 2~3분간씩 연설을 하였다. 그러고는 태극기를 높이 들고 천지를 진동시키듯 대한민국 만세를 선창하였다. 모인 사람들 모두가 선창자의 만세소리에 맞추어 대한 독립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다. 400~500명은 되어보였다. 산 위에서 나던 만세소리가 이번에는 읍내 쪽에서 나자 경찰들은 허둥지둥 아래로 달음질 쳐 내려왔다. 끊이지 않던 만세소리는 그 사이 조용해졌다. 만세를 부르던 군중들은 어디론가 다 사라지고 한 사람도 남지 않았다. 그 자리에는 종이로 만든 태극기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것이 여덟 살이었던 내가 목격한 만세운동 현장이었다.

‘이름 없는 별들’ 버려진 독립유공자들

내가 성장 한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정학균 선생과 이현열 선생은 만세운동을 일으키기 한 달 전부터 각 부락에서 가장 믿을 수 있는 책임자 한 사람씩을 선정해 놓았다. … (이들이) 사람들을 동원하였고 만세를 부르고 난 뒤에는 반드시 태극기를 반환하도록 단단히 일러두었다고 한다. … 그날 만세운동에 사용한 태극기는 배금순씨가 모두 일괄 수거하여 멀리 떨어져 있는 보리밭에서 태워버렸다. … 무엇보다 철저한 보안이 지켜졌다.

예기치 못한 시골 동네의 만세운동에 뒤통수를 맞은 경찰은 고금면 주재소에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주동자 검거에 본격 착수하였다. 당시에는 부락마다 경찰 주재소가 통제하는 유급 정보원이 한 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각각의 부락 규모들이 몇 십 호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무리 비밀리에 움직였다 하더라도 이런 일을 저지를만한 주동자급이나 가담자의 범위를 좁혀 파악하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검거열풍이 불면서 결국 지도자급인 정학균 이현열 배금순 등은 곧 검거되었다. … 검거된 인원 80명 중 15~16명을 완도경찰서로 연행해 갔다. 이 중 주동자 6명은 다음 해인 1920년 2월 보안법 위반의 죄명으로 정학균 징역 4개월, 이현열 징역 3개월을 각각 언도받았다. 나머지 4명은 징역 1개월을 언도받았으나 정상이 참작되어 태형으로 바꾸어 곤장 100대씩을 맞고 석방되었다.”

그의 경험은 인생관을 바꿔 놓았다. 광주고보에 재학 중 광주학생독립운동 직후에 있었던 백지동맹을 주도하여 퇴학당했다. 이후 그는 농촌운동과 사회운동에 투신하였다. 각 정권 때마다 사회주의운동을 하였다 하여 옥고를 치렀고, 심지어는 인민군 진주 후에도 반당분자로 몰려 2개월 옥살이를 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아직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올해는 3·1운동 100주년,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학생독립운동 90주년인 해이다. 화려한 행사로 이를 기념하였지만 그 이면에는 사상 때문에, 기록이 없어서 아직도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한 여성·농민·노동자 등 수많은 ‘이름없는 별들’이 남아있다. 심지어는 일제의 기록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을 평가하고 있기도 하다.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손으로 정리한 기록 확보’가 최우선 과제

그 자랑스러운 역사를 기념하고, 독립정신을 계승하려면 우선 기록을 발굴하여야 한다. 정부와 관련 민간단체가 합심하여 재판기록은 말 할 것도 없고 향토사, 개인 회고록, 학적부, 후손들의 구술까지 모두 뒤져 우리 손으로 정리한 역사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기념행사와 함께 후손에게 계승해야 할 중요한 당면 과제이다.

김성( 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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