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원 칼럼] 나는 왜 패션을 사랑하는가

[지재원 칼럼] 나는 왜 패션을 사랑하는가

  • 기자명 지재원 기자
  • 입력 2019.04.17 21:29
  • 수정 2019.04.20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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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저널리스트로 미국 <보그>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가 꼽힌다. 미국 <보그>는 세계 패션계의 가장 큰 시장인 미국에서 발행되고 있는데다, 1892년 창간되어 오랜 연륜을 자랑하는 패션잡지다. 안나 윈투어는 1988년부터 31년째 편집장을 맡고 있다. 그녀를 모델로 한 소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가 2006년 영화화되면서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원저자인 로렌 와이스버거가 그녀의 개인 비서를 지냈기 때문에, 이 소설속 주인공은 안나 윈투어와 동일인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영화가 나오기 10년쯤 전 안나 윈투어와 쌍벽을 이루는 패션 저널리스트가 있었다. 리즈 틸버리스다. 1992년 1월, 영국 <보그> 편집장이던 리즈 틸버리스가 미국 <하퍼스 바자>의 새로운 편집장으로 임명되자 영국과 미국의 언론들은 난리가 났었다.

“<바자>의 리즈, <보그>의 안나에게 선전포고를 하다”(뉴욕 매거진), “리즈와 안나, 잔인한 옷의 전쟁이 시작됐다”(데일리 익스프레스), “패션 퀸들이 붙다”(데일리 메일) ……

1980년대와 90년대는 세계 경제의 호황기와 맞물려 ‘고급 기성복 시대’가 최고조에 달했을 시기였다. 프랑스는 세계 패션의 유행을 선도했고, 미국은 세계 최고 디자이너들의 명품을 마음껏 소비해주었으며, 영국은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가장 전위적인 양극단의 패션을 끊임없이 창조해냄으로써 패션계 종사자들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그 시절 안나 윈투어는 이미 명성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에 비하면 리즈 틸버리스는 무명인사에 가까웠다. 나이는 리즈가 안나보다 두 살 위지만, 안나가 고교 중퇴후 패션잡지 어시스트로 입문한 반면 리즈는 대학 졸업후 인턴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패션 저널리스트로서의 경력은 안나가 많다.

에디터 초년병 시절, 리즈와 안나는 각각 다른 패션매체의 속옷 담당자로서 우연히 만나 친분을 쌓았다. 그때까지는 기자라기보다 시장조사 요원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 하소연도 주고 받는 동료 사이였다.

리즈는 바자 편집장을 맡기 전까지, 영국 <보그>에서만 22년을 보냈다. 그에 비해 안나는 1976년 미국으로 건너가 몇군데 잡지를 거쳐 미국 <보그>의 에디터로 경력을 쌓아갔다.

이들이 다시 만난 것은 1985년 가을, 미국 <보그>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였던 안나가 영국 <보그>의 편집장으로 부임하면서부터다. 이때의 심경을 리즈는 그의 자서전 <나는 왜 패션을 사랑하는가>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녀와 딱 한번 회의를 해보고 나서 이제 그녀가 영국 보그를 뿌리부터 흔들고, 미국 보그처럼 현대 도시 전문직 여성이라는 콘셉트에 맞추게 되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은 곧 자유분방한 세계와의 결별을 의미했다.”

안나 윈투어는 리즈 틸버리스의 시아버지 장례식날 아침에도 집으로 전화를 해서 일 이야기를 할 정도. 남한테 싫은 소리 못하는 리즈에 비해 안나는 단호하고 직설적이며 매사에 철두철미했고, 예의 따위를 차리기 위해 자기 뜻을 꺾는 건 용납하지 못했다. 더욱 리즈를 힘들게 한 것은 패션에 대한 인식 차이였다.

안나는 패션이란 생활에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이 강했다. 반면에 리즈는 무난하고 평범한 것은 패션의 역사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해서 유행의 최첨단을 좋아했다. 둘의 패션 지향점이 정반대였던 셈이다.

리즈 뿐 아니라 영국 <보그>의 모든 직원들은 안나의 독선적인 방식에 적응하기 힘들어 했고, 영국 언론들도 가세해 안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2인자였던 그레이스가 제일먼저 반기를 들고 회사를 떠나자 안팎으로 시달리던 안나도 편집장 임기를 채 2년도 채우지 못하고 떠나면서 리즈가 영국 <보그> 편집장이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안나는 이듬해 7월, 미국 <보그>의 편집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리즈가 미국 <하퍼스 바자> 편집장으로 갈 때 양국의 언론들이 ‘안나와 리즈의 패션전쟁’ 운운하며 관심을 보인 것은 사실상 이 두 사람이 라이벌이었다기보다 이들이 속한 미디어 그룹(보그 - 콘데 나스트 vs 바자 - 허스트)이 첨예한 라이벌 관계였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 무렵에도 두 사람의 경력이나 업계 영향력 면에서는 안나가 리즈보다는 위였다.

그런 리즈가 패션계와 일반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안타깝게도 바자의 편집장을 맡은 직후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고 사망하기 전까지 잡지 편집장의 업무를 놓지 않았던 그녀의 패션에 대한 열정과 사랑때문이었다.

<나는 왜 패션을 사랑하는가>라는 자서전은 그녀가 난소암 수술을 하루 앞둔 1993년 12월 어느날, 그녀의 집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를 여는 장면부터 시작이 된다.

그녀의 나이 46세 때였다.

책의 제목을 보면 패션 이야기가 주를 이룰 것같지만, 난소암과 그에 대한 치료과정 등의 이야기가 전체의 3분의 1 정도 될만큼 처절한 투병기록이기도 하다. 수술후 완치 판정을 받았으나 재발하여 화학치료는 물론 골수이식까지 받았다. 온몸의 털이 다 빠져 가발을 쓰고, 스스로 옷 입기도 힘들어 남편이 입혀줘야 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바자 편집장으로서의 일을 놓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가 편집장을 맡은 동안 미국잡지에디터협회에서 주는 상을 여러 차례 받는 등 <하퍼스 바자>의 제2 전성기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리즈는 자서전을 펴낸 2년 뒤 5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4월21일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지 20주년 되는 날이다.

패션 저널리스트로서, 입양한 두 아들의 엄마로서, 교수와 제자로 만났던 남편의 아내로서,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자신의 일과 삶을 사랑해온 리즈 틸버리스. 그녀의 20주기를 추모한다. <본사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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