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의 관풍(觀風)> 자유한국당에 걸린 김영삼 ‘사진’의 의미

<김성의 관풍(觀風)> 자유한국당에 걸린 김영삼 ‘사진’의 의미

  • 기자명 김성
  • 입력 2019.02.26 1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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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8일 국회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장에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지난 14일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는 자유한국당을 향해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과거 수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확인되면 반드시 아버님의 사진은 그곳에서 내려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지난 18일 국회 자유한국당 비상대책위원회 회의장에 김영삼 전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다. 지난 14일 김 전 대통령의 차남 현철 씨는 자유한국당을 향해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과거 수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확인되면 반드시 아버님의 사진은 그곳에서 내려주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1979년 12월12일, 보안사령관이자 박정희대통령시해사건합동수사본부장이었던 전두환 소장은 자신의 상관이자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대장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 관련자로 체포·구금하고 공백상태였던 국가권력을 실질적으로 장악했다.

단식 농성으로 5·18을 정치쟁점화 성공한 김영삼

1980년 5월, 전두환 등 신군부는 학생시위를 핑계로 전국비상계엄을 확대하고 광주에서 학살극을 펼쳤다. 그리고 김대중에게 내란음모죄로 사형 판결을 내리고, 김영삼에게는 강제로 정계은퇴를 발표하게 했다. 무수히 많은 사람이 투옥되거나 해직됐고, 정치는 정치정화법에 의해 앵무새 정당만 남게 됐으며 언론에는 재갈이 물려졌다. 대한민국은 얼어붙은 땅이 됐다. 이때 진실을 향한 뜨거운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3년째 상도동에서 연금 상태에 있던 김영삼이 1983년 5·18 3주년을 맞아 ‘민주회복’ ‘정치복원’‘언론자유’‘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를 위한 5개항을 발표하고 단식농성에 들어간 것이다.

단식 8일째인 5월 25일, 그의 몸무게가 14kg이나 빠지고 건강이 악화되자 전두환 정부는 치료를 거부하는 김영삼을 강제로 서울대학교병원에 입원시켰다. 전두환은 사흘간 측근을 병실로 보내 단식 중단을 요구했으나 김영삼은 이를 거절하였다. 그의 정치적 동지들도 동조단식에 들어갔다. 6월 4일에는 전두환에 의해 미국으로 보내졌던 김대중도 교포들과 함께 워싱턴 한국대사관과 백악관 앞에서 “김영삼을 구출하라”며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그의 단식소식은 신군부의 보도통제로 세상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단식 사흘째에야 한 신문 정치면 가십난에 ‘재야인사 문제’라는 애매한 표현으로 기사화 됐다.

전두환 정부에도 비상이 걸렸다. 그의 단식을 계기로 정치활동을 막아놓았던 재야인사들과 학생들이 다시 민주화를 요구하고 나설 수 있었고,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국제적인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단식 23일째인 6월 10일,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윤보선, 강원룡, 문익환 등 재야 원로 인사들의 간곡한 권유로 김영삼은 단식 중단을 선언했다. 그리고 말했다.

“국민 여러분, 나는 부끄럽게 살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 서서 싸우다 죽기 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겨우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김영삼은 이후 김대중과 함께 1985년 12대 총선에서 선명 야당인 신민당 돌풍을 일으켰고, 1987년 6·10항쟁을 거쳐 국회 광주진상조사특별위원회 청문회, 직선제 헌법개정을 이끌었다.

1989년 12월 31일, 전두환 전 대통령이 국회에서 알맹이 없는 증언을 마치자 노태우 정권은 5·18을 서둘러 마무리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현 정부는 광주 유혈의 연장선상에 있는 민주정부” 담화

1990년 1월 22일, 김영삼이 노태우-김종필과 함께 인위적인 3당 합당에 참여하자 여소야대였던 정치상황은 민자당이라는 거대여당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하여 국회 광주특별위 결과보고서는 채택되지 못했고, 이 해 7월 14일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 등에 관한법률’도 여당 단독으로 기습통과됐다.

그러나 김영삼은 달랐다. 민자당 후보로 14대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취임 첫 해인 1993년 5월 13일 “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민주주의의 밑거름이며, 현 정부는 그 연장선 위에 서있는 민주정부로서 그 정신을 기리고 명예를 높일 사업을 적극 지원할 것”이라는 5․18특별담화를 발표했다. 또 군부 내의 파벌집단인 하나회를 해체하고, 금융실명제를 도입하였다. 그러나 검찰은 5·18 가해자에 대한 잇따른 고소사건들을 기소유예 또는 불기소 처분했다.

1995년 가을, 두 전직 대통령이 수천억의 재산을 은닉했다는 폭로가 잇따르자 김영삼 대통령은 검찰의 전면적인 재수사와 함께 집권 민자당에 특별법 제정을 지시하였다. 이렇게 하여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됐다. 세계 역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전두환 무기징역·국가기념일 제정으로 민주장정 끝내

2년 뒤인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은 전두환에게 무기징역, 노태우에게는 징역 17년을 확정 판결하였다. 전두환의 죄명은 반란수괴, 내란수괴, 내란목적 살인, 특정범죄가중처벌등에관한법률위반(뇌물) 등 9개였다.

이 해 5월 9일, 정부가 ‘5·18민주화운동 국가기념일’을 제정 공포함으로써 5·18은 공식적으로 결론이 났다. 17년간 민주주의를 향한 대장정의 결과였다.

5·18은 ① 불법적인 공권력에 광주시민이 항거하면서 시작되어(1980년) ② 광주시민을 학살한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전 국민의 저항으로 발전하였고(1987년 6·10항쟁) ③ 마침내 신군부 책임자들을 처벌함으로써 더 이상 군인들이 불법적으로 정권을 잡는 일이 없도록 하는 한편(1997년) ④ 대통령 직선제 등 헌법을 개정하여 민주국가를 이룩한 ‘민주화 운동’(1997년)이었다고 정의할 수 있다.

김영삼은 5·18이라는 단어조차도 꺼낼 수 없었던 엄혹한 시기에 ‘단식’을 통해 정치쟁점화 하였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두 전직 대통령을 단죄(斷罪)함으로써 민주화를 가져온 정치인이 되었다.

자유한국당 당사(黨舍)에는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의 사진이 걸려있다. 그것은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으로서 이승만을, 산업화의 주역으로서 박정희를, 민주화를 이룩한 정치지도자로서 김영삼을 계승하겠다는 의지를 표방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전두환·노태우·이명박·박근혜 등과는 단절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김현철, “군사독재 향수 버리지 않으려면 사진 내려라”

그런데 전·노를 단죄하고 22년 이 지난 올 2월 14일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씨는 자유한국당에 대해 “아버지의 사진을 내려 달라”고 했다. 즉 “작금의 한국당이 박근혜 정권 탄핵으로 처절한 반성, 환골탈태를 보여도 시원찮을 판에 다시 과거 군사독재의 향수를 잊지못해 회귀하려는 불순한 움직임이 감지된다”며 “이번 전당대회를 통해 과거 수구적인 모습으로 되돌아간다면 반드시 아버님의 사진은 내려달라”고 했다. 2월 8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지만원씨의 북한군 특수부대 600명 침투설 공청회에서 자유한국당 소속 김진태·이종명·김순례 의원이 5·18에 대한 망언을 터뜨렸고, 전당대회 또한 역사를 거스르는 과거로 회귀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과연 자유한국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진을 내릴지, 아니면 사진은 걸어둔 채 그의 평생 노력을 욕보이는 일을 계속할지 그 선택이 궁금하다.

김성(시사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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