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과 고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보리피리

가난과 고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보리피리

  • 기자명 박상건 기자
  • 입력 2019.02.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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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풍경이 있는 세상] 24 한하운, ‘보리피리’

[데일리스포츠한국 박상건 기자]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피-ㄹ닐니리.

 

- 한하운, ‘보리피리’ 전문

 

흑산도 여행 때였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배기에 어미 소가 풀을 뜯고 있었다. 그러다 한동안 먼 바다를 쳐다보는 것이다. 마치 객지로 떠난 자식의 뒤안길을 한동안 응시하는 어머니의 모습과 오버랩 됐다.

그런 환영이 찰랑찰랑 일렁이는 보리밭에 피닐니리 피닐니리 피리소리가 바람결에 실리고 있었다. 유년시절 보리피리는 놀이기구로 제격이었다. 그뿐인가. 부드러운 청보리는 나물로 데쳐도 먹기도 했고 누렇게 여물면 불에 구워 먹었다. 그 보리밭 오솔길에는 쟁기질하던 할아버지 의 추억도 담겨 있다. 쌀이 귀했던 시절, 보리 밥풀떼기를 담은 삼태기는 부엌 입구 툇마루 위에 걸려 있었다. 보리는 배 고품을 덜어주는 개떡과 고구마 몇 개와 늘 담겨 있었다. 그것들은 식구들 삼시세끼를 보장하는 삶이고 위안이었다.

한하운 시인은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 15살 때 한센인 판정을 받은 뒤 방황하다가 1948년에 월남했다. 그는 명동성당과 삼각지 다리 밑을 전전했다. 한센병 환자 70여명을 모아 자치위원장을 맡아 인천 부평 만월산 골짜기에 둥지를 틀었다. 정들었던 그 ‘눈물의 언덕’은 그가 세상을 등진 후 공장과 양계장, 공동묘지가 들어서면서 흔적 없이 사라졌다.

그는 1949년 ‘나시인 한하운 시초’라는 시 13편을 ‘신천지’에 발표하며 등단했다. 이 시는 1955년에 펴낸 시집 ‘보리피리’에 실린 60여 편 중 한 작품이다. 한센병으로 방황했던 이녁 삶의 애환과 어린 시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그렸다. 그런 시절을 관통한 우리 모든 민초들에게도 가난과 고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그는 1975년 인천 부평구 자택에서 간경화로 숨졌다. 그런 연유로 인천 부평역사박물관은 2017년 12월 14일 부평구 십정동 백운공원에서 ‘한하운 시비’를 세웠다.

글, 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청보리밭
청보리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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