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해 포토 에세이] 돌무덤 발굴하던 한적한 시골마을, 백제영광 간직한 역사고증 산실로

[김광해 포토 에세이] 돌무덤 발굴하던 한적한 시골마을, 백제영광 간직한 역사고증 산실로

  • 기자명 김광해 기자
  • 입력 2019.02.15 07:42
  • 0
  • 본문 글씨 키우기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911년 석촌동 일대 4세기 유적지 확인 … 80여기 고분 기록

[데일리스포츠한국 김광해 기자]

서울시 송파구 석촌동 일대 약 5만평방m에는 초기 백제고분군이 몰려 있어 1975년 5월 사적 제243호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해오고 있다. 일찍이 일제 강점기에 백제고분들이 80여기나 모여 있어서 주목을 끌었는데 본격적인 발굴작업은 1974년부터 시작되었으며, 1987년엔 인근의 민가들을 모두 철거하고 백제고분공원으로 조성하였다. 민가들이 철거되기 전인 1982년 4월과 5월 두차례에 걸쳐 촬영한 당시의 석촌동과 현재의 모습.

1982년 유적지 발굴조사 작업이 진행되던 당시의 석촌동. 뒤로 보이는 가락시영아파트 자리엔 헬리오시티 아파트가 들어섰다.
1982년 유적지 발굴조사 작업이 진행되던 당시의 석촌동. 뒤로 보이는 가락시영아파트 자리엔 헬리오시티 아파트가 들어섰다.

 

2019년 현재의 백제고분터 복원 모습. 뒷쪽으로 보이는 아파트가 석촌동 헬리오시티 단지다.
2019년 현재의 백제고분터 복원 모습. 뒷쪽으로 보이는 아파트가 석촌동 헬리오시티 단지다.

1911년 처음 조사가 이루어질 때부터 이곳은 백제시대 유적지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되었다. 1916년 가을에 이루어진 조사에서는 이 일대의 고분들이 돌무지무덤과 흙무덤으로 구분되었는데, 같은 해에 간행된 <조선고적도보>에 의하면 흙무덤 23기와 돌무지무덤 66기 등 최소 89기의 고분들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전문가들은 백제시대 중에서도 초기 백제의 유적지로 추정했는데 고구려식 돌무덤과 백제식 돌무덤 양식이 섞여 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본격적인 발굴조사작업이 진행되면서 고구려와 백제의 유물들이 함께 출토되자 초기 백제시대 유적지라는 게 확실해졌다.

이 지역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조사작업은 그로부터 60여년이 지난 1974년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나 1974년 잠실지구 유적조사단에서 발굴을 시작했을 때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것은 3,4호분(적석묘)과 5호분(봉토분) 뿐이었다니, 60여년 사이에 80여기의 고분들이 사라진 것이다. 남아 있는 몇 안되는 고분들도 대부분 도굴된 상태여서 아쉬움이 크지만, 뒤늦게나마 이 지역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백제고분공원을 조성해 관리하고 보존하기 시작한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1982년 고분 발굴 장면. 동네 여기저기에서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1982년 고분 발굴 장면. 동네 여기저기에서 발굴작업이 이뤄지고 있었다.

1호분은 북분과 남분으로 연결된 쌍분으로 남분은 고구려식, 북분은 백제식 돌무지무덤 양식으로 조성되었다. 1987년 조사 때엔 남분에서 귀후비개로 추정되는 은제품이 출토되기도 했다.

2호분은 한변의 길이가 17m 내외의 규모로 3단을 이룬 전형적인 백제식 돌무지무덤으로 1987년 조사시 단경호와 철도자 등 백제유물들이 출토되었다.

3호분은 전형적인 고구려식 돌무지무덤으로 3단만 남아 있지만 원래는 몇단이 더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 1983년 발굴작업시 이미 도굴된 상태였는데, 주변에서 4세기대의 중국 도자기가 출토되어 무덤 조성 시기를 짐작케 해주었다. 1986년 추가 발굴 조사 때엔 금제영락과 옥연마석 등이 출토되어 4세기 후반 백제 근초고왕의 무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3호분 남쪽에 위치한 4호분 역시 전형적인 고구려 양식인데 규모는 동서 50.8m, 남북 48.4m인 4호분보다 적은 17x17m 정도다. 석축이 붕괴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다시 2단의 석축을 돌린 3단의 돌무지무덤이다.

5호분은 현재 봉토가 덮인 형태를 띄는데 아직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부구조는 알려지지 않았다.

석촌동 돌무지묘의 상한 연대는 4세기 중엽으로 추정되며, 475년 공주로 천도한 이후에는 돌무지묘가 더 이상 축조되지 않고 석실분으로 전환되었다.

석촌동 백제고분군은 초기 백제 지배층의 묘역으로 밝혀지고 있는데, 시기별로 다양한 묘 형태가 복합되어 있어서 지배층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주고 있으며 초기 백제문화를 연구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 곳이다.

집앞 공터에서 소꿉놀이와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 1982년 모습.
집앞 공터에서 소꿉놀이와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 1982년 모습.

 

동네 한쪽에 방치(?)돼 있는 해태상. 이 중국음식점 앞쪽으로 지하차도가 생겼다.
동네 한쪽에 방치(?)돼 있는 해태상. 이 중국음식점 앞쪽으로 지하차도가 생겼다.

 

물지게를 지고 물을 나르던 아낙의 모습. 1982년.
물지게를 지고 물을 나르던 아낙의 모습. 1982년.

나는 이 일대에서 고분발굴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1982년 4월5일과 5월5일 두차례에 걸쳐 현장을 찾아가 촬영했다. 민가들이 철거되고 백제고분공원으로 조성되기 5년전이다.

이때만 해도 석촌동 일대는 동네 군데군데 발굴조사작업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을 제외한다면 특이할 게 하나도 없는, 한적하고 여유로운 그저 평범한 시골 동네와 같았다.

1989년에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 235년의 회화나무는 내가 촬영하던 1982년에도, 나무의 형태는 지금보다 많이 남아 있었지만 이미 고사목이었다.

초가집과 기와집, 양옥집이 섞여 있던 석촌동의 당시 모습은 지금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이 감쪽같이 변해버렸다.

송파구청에서 한때 보호수로 지정했던 수령 235년의 회화나무. 내가 촬영하던 1982년에 이미 고사목이었다.
송파구청에서 한때 보호수로 지정했던 수령 235년의 회화나무. 내가 촬영하던 1982년에 이미 고사목이었다.

 

2019년 현재의 회화나무. 지금은 나무줄기 형태도 없이, 몸통만 남아 있는 상태다.
2019년 현재의 회화나무. 지금은 나무줄기 형태도 없이, 몸통만 남아 있는 상태다.

그때나 지금이나 고사목인 보호수와 4호분 발굴현장, 헬리오시티 아파트가 들어서기 전의 가락시영아파트 모습이 그나마 지형을 짐작하게 해줄 뿐이다. 글/사진 김광해기자 

 

저작권자 © 데일리스포츠한국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