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재원 칼럼 <어른 있는 사회>

지재원 칼럼 <어른 있는 사회>

  • 기자명 지재원 기자
  • 입력 2019.02.12 11:02
  • 수정 2019.02.15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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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월1일, JTBC의 <SKY 캐슬>이 시청률 23.8%라는 비지상파 방송 사상 최고의 기록을 세우고 종영했다. 작년 11월말부터 2개월여동안 ‘대한민국엔 스카이 캐슬을 본 사람과 안 본 사람, 두 부류가 있다’고 할 정도로 오래간만에 커다란 반향을 일으킨 드라마다.

대한민국 상위 0.1%가 모여사는 ‘스카이 캐슬’ 안에서 3대째 의사배출을 목표로 수십억원짜리 입시 코디를 붙인 한 가정(강준상 한서진 부부)을 중심으로, 때로는 스릴러처럼 때로는 코믹하게 20회동안 시청자들을 쥐락펴락해 ‘캐슬러’라는 신조어까지 낳았다.

첫회부터, 아들이 서울의대에 합격해 주민들이 호화스런 환영회까지 열어준 가정의 엄마가 엽총자살을 해 이 드라마가 앞으로 심상치 않을 것을 예고했는데, 서울법대와 차장검사를 거친 로스쿨 차민혁교수의 자랑스러운 ‘하버드대 재학생’ 딸은 가짜였고, 강준상 한서진부부의 딸(강예서)과 전교 1등을 다투던 김혜나는 강준상의 혼외자인데다, 의문의 추락사를 하는 등 이 드라마는 20회 내내 시청자를 마음 편하게 놔두질 않았다.

피라미드의 제일 꼭대기에 오르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차민혁교수가 저녁에 출근하는 클럽 MD인 딸 세리에게 ‘실패한 인생’이라고 했다가 오히려 역공을 받는다. “자식들한테 존경받지 못하는 아빠야말로 실패한 인생”이라고.

수업시간에 “SKY대학(서울대 고대 연대)을 나오지 않으면 사람 대접 못받는다”고 말하는 교사에게 차교수 아들은 “그게 선생님으로서 할 말이냐?”면서 노트를 집어던지고 교실밖으로 뛰쳐 나간다.

20부작인 이 드라마는 거의 매회 반전의 스토리가 펼쳐지지만, 드라마 전체의 반전은 마지막 회에 있었다.

서울의대에 합격만 시켜달라고 수십억원짜리 코디에게 매달려온 한서진과 강준상 부부, 엽총자살로 아내를 잃은 박수창교수, 강압적인 교육관으로 가족들로부터 버림받았던 차민혁교수, 살인혐의로 구속된 입시 코디 김주영 등 이래저래 파란만장한 장면을 연출했던 등장인물들이 모두 욕망을 내려놓고 각성하는 ‘해피엔딩’이었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청소년 심리치료 전문가인 독일의 미하엘 빈터호프는 어린애같이 행동하는 어른을 ‘어른 아이’라고 정의한다. 드라마 <스카이 캐슬>에서 우리는 여러 유형의 어른 아이들이 어른으로 변모해 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만 19세가 되면 성년이다. 술이나 담배를 마음대로 살 수 있고, 대통령 국회의원 선거에 투표할 권리도 생긴다. 부모 동의없이 결혼도 할 수 있다.

미국은 주마다 차이가 있긴 하나 보통 만 18세부터 성인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술은 20세가 넘어야 살 수 있고 호텔 숙박은 21세가 넘어야 가능한 곳이 많다.

만 17세면 입대가 가능한데, 20세 미만의 병사들은 PX에서 술을 살 수 없다. 우리보다 사회분위기가 훨씬 자유스럽다는 미국에서도 성년과 미성년의 구분은 이렇게 매우 엄격하다.

그러나 법적으로 성인의 기준을 넘어섰다고 해서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성인이 되려면 어느 정도 성숙의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소설가 박완서 선생은 60대가 되어 쓴 에세이집에서 ‘나이들수록 아집, 독선, 물질과 허명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사람들을 보면 차라리 치매가 나을 정도’라면서 성숙하지 못한, ‘추잡한 늙음’을 경계했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 우치다 다쓰루는 <어른 없는 사회>라는 책을 통해 아예 “일본엔 어른이 없다”고 질타한다. 모든 사람이 다 어른일 필요는 없고 다섯명 중에 한명만 어른이어도 사회제도가 유지될 수 있는데 일본사회의 어른 비율은 5%에 불과해서 일본사회의 시스템이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치다 다쓰루가 정의하는 ‘어른’은 그렇게 유별나지도 않다. 길에 빈 깡통이 떨어져 있을 때 그것을 주울 줄 아는 사람이 ‘어른’이고, 그런 일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이’라는 것.

등산이 취미인 카이스트대학 L교수는 산에 갈 때면 까만 비닐봉지를 늘 휴대한다. 산행중에 쓰레기가 눈에 띄면 넣어오기 위해서다. 어찌보면 아주 사소한 일인데, 볼 때마다 스스로 부끄러워졌던 기억이 난다.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갈수록 어른이 없어지고 있다고 걱정하는 목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다.

그런데 작년 12월31일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은 역설적이게도 우리 사회에 어른이 있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시켜 준다.

진료중인 환자가 휘두른 칼에 숨진 고 임세원교수는 1971년생으로 47년의 짧은 생을 어이없게 마감했다. 슬하의 자녀도 고2, 초등학교 5학년으로 아직 어리다.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임세원 교수는, 진료시간이 지나서 온 환자를 마다하지 않고 진료했는데 그 과정에서 흉기에 찔리고, 간호사들을 피신시키려다가 본인은 결국 희생당하고 말았다.

영결식장에서 임교수의 어머니는 “우리 아들 세원이 바르게 살아줘서 고맙다”고 마지막 인사를 건넸고, 여동생은 유가족을 대표한 인사에서 “가족의 자랑이던 임세원 의사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의료진 안전을 보장하고 모든 사람이 정신적 고통을 겪을 때 사회적 낙인없이 치료와 지원을 받는 환경을 조성하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도 유가족들은 의사로서의 바른 태도와 의료진의 안전, 환자의 치료를 앞세운 것이다. 조의금 1억원도 정신건강재단에 기부했다.

임세원 교수 본인뿐 아니라 유가족들은 우리 사회에 아직도 존경할만한 어른이 있다는 것을 진한 감동과 함께 보여주고 있다.

고인이 근무했던 성균관대에서는 임교수가 개발한 ‘보고듣고말하기’ 자살예방교육 프로그램을 전체 학부생을 대상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정신건강재단에서는 임교수 유가족이 기증한 1억원에 자체 성금을 더해 ‘임세원 상’을 만들기로 했다.

임세원교수와 그 가족 덕분에 우리 사회에 임교수 닮은 ‘어른’이 더 많아지게 될 것같다. 고귀한 희생이 아닐 수 없다. 

지재원(본사 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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