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초대석]네팔 아프리카 등 지구촌을 무대로 패션쇼 여는 ‘천연기념물’ 패션 디자이너 홍미화

[금요 초대석]네팔 아프리카 등 지구촌을 무대로 패션쇼 여는 ‘천연기념물’ 패션 디자이너 홍미화

  • 기자명 지재원 기자
  • 입력 2019.02.08 14:55
  • 수정 2019.02.11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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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디자이너 홍미화
패션 디자이너 홍미화

[데일리스포츠한국 지재원 기자] 1993년 7월, 프랑스 파리 빈센트 숲속에서 때아닌 반딧불이 500마리로 패션쇼 피날레를 장식해 참석자들을 경악케 했던 패션 디자이너 홍미화. 당시 한국 출신 신예 디자이너 홍미화는 그 데뷔쇼를 계기로 10여년동안 프랑스에서 가장 ‘핫한’ 한국인 디자이너로 주목받았다.

2018년말, 아프리카 가나와 남아공 등에서 현지인을 모델로 패션쇼를 열어 주민들에게 큰 즐거움과 희망을 선사했다. 3년전엔 지진으로 붕괴된 네팔을 찾아가 네팔 천연소재 네틀을 이용한 패션쇼로 현지인들에게 위로와 함께 희망과 즐거움을 주었다. 다음 행선지는 남아메리카.

데뷔무대에서부터 프랑스 파리를 뒤흔들어 놓았던 패션 디자이너가, 이제는 네팔 아프리카 남미쪽으로 눈을 돌려 패션쇼를 개최하고 있다. 그 이유가 뭘까?

홍미화 파리 컬렉션
홍미화 파리 컬렉션

서울 중구 신라호텔 뒤편, 성곽길을 따라 가다보면 왼편으로 홍미화의 쇼룸과 작업실이 나온다. 얼핏 보면 일반 가정집과 잘 구별되지 않아서 찾기가 쉽지 않다. 일부러 숨어 있는 것같은, 서울 중구 동호로의 작업실에서 홍미화 디자이너(64)를 만났다.

“파리에서 데뷔쇼할 때 반딧불이는 어떻게 구해 갔어요?”

오래전부터 궁금했던 것부터 물어보았다.

“내가 일본에서 공부했잖아요. 그때 일본에 반딧불이 박사가 있다는 걸 알고 수소문해서 그분께 부탁했어요. 수개월동안 정성껏 기른 반딧불이들을 행사 당일 비행기로 공수해와서 패션쇼 때 쓴 겁니다”

세계 패션계의 중심으로 불리는 파리 패션쇼는 보통 3월과 9월에 열린다. 그런데 홍미화는 7월에, 그것도 한밤중에 빈센트 숲속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린 뒤 그 일대 숲을 무대로 데뷔 패션쇼를 열었다.

“그때 우리 행사를 맡았던 분이 저보고 또라이라고 했어요. 어느 것 하나 정상적인 것이 없었거든요. 유럽의 7월은 휴가기간이라 기자들 모으기도 어렵고, 패션쇼는 일정기간에 몰려서 하는데 그것도 아니고, 한밤중 야외에서, 살아있는 반딧불이까지 날리겠다고 하니까 어이가 없어서 입을 못다물더라구요”

다행인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포기하지 않고 행사를 끝까지 맡아주었다는 것이다. 홍미화를 파리로 초청했던 에이전시 22사 장 끌로드 시루뜨 대표는 그후로도 파리에 진출하는 한국 디자이너들의 행사를 맡는 등 지금까지 한국 디자이너들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7월의 파리는 밤이 늦게 찾아온다. 어두워져야 달빛과 별빛, 반딧불빛까지 어우러지는 패션쇼를 할 수 있기 때문에 (통상 패션쇼 후에 하는) 파티를 먼저 했다.

“어쩌면 파티를 먼저 해서, 술기운도 좀 있었던 까닭에 관객들이 내 퍼포먼스에 더 열광했는지도 몰라요(웃음)”

홍미화 디자이너의 파리 데뷔쇼에는 반딧불이 외에도 대나무와 한지로 만든 조명등을 기둥에 달고, 남자 모델이 베잠방이 차림에 지게를 지고 나오는가 하면 한국과 중국풍의 의상을 현대화한 옷들로 그동안 파리 무대에서 보지못한 동서양이 하나로 어우러진 의상들로 극찬을 받았다.

홍미화는 일본 유학과 프랑스 파리 마케팅 연수과정을 거쳐 일본 패션회사에서 활동하다 1987년 한국 데코와 계약, 텔레그라프라는 브랜드를 런칭한다. 떠들썩하게 파리무대에 데뷔한 직후인 1994년에는 한일합섬과 계약을 맺고 ‘레쥬메’라는 브랜드를 책임진다. 패션 디자이너와 기업이 본격적으로 협업한 첫 케이스였다.

2003년까지 파리 컬렉션에 참가한 홍미화 디자이너는 한국과 프랑스 일본 등지에서 활발한 전시와 판매활동을 하며 성가를 높여왔다.

“한일합섬, 동일레나운 등과 협업을 하면서 내 개인 브랜드도 함께 운영하다보니 밑빠진 독에 물붓기 같았어요. 내가 좀 손이 커서, 완성도를 높이는 데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단추 한 개에 10만원짜리도 쓰고... 그런 식으로 하니까 국내외에서 성가는 많이 높였어도 회사 수익은 늘 바닥이었지요~”

10대와 20대 시절 홍미화는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 옷’을 입고 다니는 게 멋이라고 생각해, 어디서든 눈에 띄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30대가 되자, 본인 치장엔 관심을 두지 않고 오로지 다른 사람 치장하는 데에만 신경을 썼다. 요리사가 물에 밥 말아먹기도 하는 것처럼.

40대 중반부터는 ‘옷’만이 아니라 생활 전반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서 학용품 디자인, 욕실 디자인 등 ‘라이프 스타일 디자이너’로 영역을 넓혀갔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인 1980년대 중반, 일본에서 ‘생활의 달인’이라는 브랜드를 만든 것도 그 일환이었다고. 한국으로 터전을 옮긴 뒤 본인이 몸담고 있던 회사의 인테리어도 본인이 다 한 경우가 많고, 경기도 양수리엔 본인이 설계와 인테리어까지 담당한 작업실을 직접 짓기도 했다.

“60세가 되니까 아, 이제부터는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더군요. 패션으로 소통을 하고 싶은데, 소외받고 있는 지역 사람들과 제일 먼저 하고 싶었어요”

네팔 패션쇼
네팔 패션쇼

일본인 남편 쿠지 히데츠씨와 함께 인도, 네팔지역의 친환경 섬유 시장조사를 하다가 네팔에서 네틀 사업을 하는 정정철사장을 만나게 되었다.

네틀은 네팔 고산지대에서 자라는 천연섬유로 꼬임을 약하게 주면 울, 강하게 주면 린넨 효과를 내는 등 장점도 많고 그런만큼 활용도가 높은 친환경섬유다. 다만, 야생상태로 채취하기 때문에 공급이 제한적인 것이 취약점이다.

2015년 11월, 네틀 섬유 위주의 패션쇼를 네팔에서 열기로 하고 2년동안 준비를 해왔는데 하필 그해 4월 네팔에서 진도 7.9의 강진이 일어나 8천5백명 이상이 사망하고 수도 카트만두가 폐허가 되다시피 무너져버렸다.

“온 나라가 지진으로 무너져 내렸는데, 패션쇼를 할 수 있겠냐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내가 네팔에서 패션쇼를 하려는 건 상업적인 목적이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잘됐다, 지진 피해입은 네팔사람들을 가서 위로해주자 하는 마음으로 강행했습니다”

원래 패션쇼를 하기로 한 네팔 뮤지엄이 지진피해 복구가 되지 않아서 행사가 취소되었다. 행사가 취소되자 현지 일을 돕기로 했던 정정철사장도 한국으로 귀국했는데, 홍미화 디자이너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네팔로 가서 마당이 있는 넓은 식당을 찾아내 패션쇼를 치러냈다.

“파리에서는 무대와 의상, 소도구를 이용해 자연친화적인 패션쇼를 했다면 네팔에서는 지진이 일어난 네팔로 찾아가던 그 순간부터 패션쇼를 마치고 돌아오는 순간까지, 그 모든 것이 ‘자연 그대로’였습니다. 자연친화적인 분위기를 꾸밀 이유가 없었던 거지요. 그때를 계기로, 파리를 중심으로 생각했던 그동안의 내 패션관도 분명하게 바뀌게 되었습니다”

패션쇼를 보며 흥에 겨운 아프리카 관객들
패션쇼를 보며 흥에 겨운 아프리카 관객들

 

아프리카 패션쇼장에서, 행사에 앞서 인사말하는 홍미화 디자이너
아프리카 패션쇼장에서, 행사에 앞서 인사말하는 홍미화 디자이너

네팔에서 돌아온 후 다시 3년을 준비해 이번엔 아프리카로 떠났다. 2018년 11월부터 12월까지 남아공 도시와 가나의 쿠마시까지 4개지역에서 현지인을 모델로 섭외해 ‘동네축제’같은 패션쇼를 열고 돌아왔다.

네팔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인지, 아프리카 패션쇼는 처음부터 접근방식이 달랐다.

네팔 때와 달리 프로 모델은 한명도 데려가지 않았고, 네틀과 같은 천연섬유 의상에도 매달리지 않았으며 현지인을 위로해준다거나 하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는 곳마다 패션쇼는 그 지역에서 처음 보는 행사라고 합니다. 완전히 동네 축제였어요. 현지에서 픽업한 모델들이라 맞지 않는 부분은 즉석에서 고쳐서 입혔고, 무대에 서고 싶은 관객이 갑자기 런웨이로 뛰어 올라오는가 하면 패션쇼 음악과 상관없이 환호성을 지르고... 평생 수많은 곳에서 패션쇼를 해봤지만 이번 아프리카에서처럼 완전히 ‘날 것’같은 이미지의 패션쇼는 처음이었어요”

옷을 통해 원초적인 즐거움을 만끽하는 사람들, 디자이너와 모델과 관객의 구별이 없이 혼연일체가 될 줄 아는 사람들, 준비된 음악과 무대와 의상을 뛰어넘어 창의적인 퍼포먼스를 할 줄 아는 사람들... 그들을 보면서 홍미화는 감격을 넘어, 마치 전기에 감전된 것같은 전율을 느꼈다.

20여일간의 강행군 끝에 아프리카 순회 패션쇼를 마친 디자이너 홍미화는 ‘아프리카는 우리가 도와줄 데가 아니라 우리가 잃어버린 것을 간직하고 있는 곳’임을 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다음 목표는 볼리비아 우유사막을 포함한 남미지역으로 잡았다.

네팔, 아프리카 순회 패션쇼를 자비로 준비했듯이 남미 패션쇼도 자비로 준비하고 있다. 스폰서를 구하면 좀더 편하게 ‘세계문화교류 패션쇼’를 치를 수 있지 않겠냐고 묻자 돈 대주면 구속하려 들지 않느냐면서 자비로 가는 게 편하다고 한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돈을 벌만큼 벌어봤고 쓸만큼 실컷 써보기도 했다는 홍미화 디자이너. 전성기 때와 비교하면 경제적으로는 많이 어려워졌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어떤 선입관에도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패션세계를 자신이 펼치고 싶은 곳에서 펼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참 보기 드문, ‘천연기념물’ 패션 디자이너가 아닐 수 없다.

다음번 남미에서는 어떤 퍼포먼스가 있을지, 디자이너 홍미화는 또 어떤 패션세계를 경험하고 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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