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 초대석] 40년 ‘채상장’ 외길인생 서신정... 대나무 공예에 담은 혼

[금요 초대석] 40년 ‘채상장’ 외길인생 서신정... 대나무 공예에 담은 혼

  • 기자명 지재원 기자
  • 입력 2019.02.03 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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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스포츠한국 지재원 기자] 채상(彩箱)은 대나무를 얇게 잘라 색깔을 입혀 만드는 전통 고급 죽세공품으로, 이를 만드는 ‘채상장’은 우리나라에서 단 한사람뿐이다. 국가 무형문화재 제53호 채상장 서신정이 그 주인공. 1979년, 열아홉살에 입문해 올해로 40년째 전통 장인 외길을 걸어온 서신정의 작품세계와 삶.

국가 무형문화재 제 53호 채상장 서신정 장인
국가 무형문화재 제 53호 채상장 서신정 장인

날씨가 푹푹 찌는 한여름, 어느 부잣집에서 밥해 놓은 것을 잘못 놔두는 바람에 쉬어버렸다. 주인 마님에게 들킬까봐 염려한 하녀는 몰래 대밭에다 쉰밥을 버리고 대잎으로 덮어놓았다. 대밭을 산책하던 마님이 어디선가 향내가 나길래 대잎을 들춰보았다. 그랬더니 하얀 쌀밥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데 바로 거기서 향내와 술냄새가 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 전라남도 담양의 특산품 ‘죽엽청주’라고 한다.

지금은 도시화되면서 대밭이 점점 사라지고 있지만,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담양 일대에서 ‘대밭’이 없는 지역이 없을 정도로, 담양은 대한민국 제일의 대나무 산지다.

3합채상세트
3합채상세트

각종 바구니와 소쿠리, 광주리, 채반, 대자리, 베개, 부채에 패랭이와 삿갓, 죽비와 죽도, 회초리에 이르기까지 대나무를 소재로 만드는 갖가지 일상용품들이 담양지역 특산품이다.

죽엽청주, 추성주(대잎술)를 비롯해 대잎차, 대숲향죽로차 등도 담양 특산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제품들이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최고의 자랑거리는 ‘채상(彩箱)’이다.

채상은 대나무를 얇게 입으로 뜨고, 훑고, 천연염색으로 오방색깔을 입혀 문양을 넣어 상자를 만드는 것으로, 이를 만드는 장인을 채상장이라 하는데 도구라고는 대칼 하나 뿐이다. 모든 공정이 섬세하고 까다로운 수작업인데다 제작기간도 많이 걸린다. 옛날엔 서민들은 꿈도 못꾸고 임금님 진상품이나 극소수 양반들만이 소유했던 진귀한 최고급 죽세공품이다. 달걀도 짝퉁을 만들 정도로 짝퉁으로 못만드는 게 없다는 중국에서조차 채상작품은 짝퉁이 없다고 한다.

현대식 반짇고리함
현대식 반짇고리함

중국뿐 아니라 전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색깔이 들어간 죽세공품은 없다고 하니 그만큼 우리나라 채상작품은 희귀한 전통 문화유산인 셈이다.

채상 기능 보유자를 ‘채상장’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엔 현재 국가 무형문화재 제53호인 서신정 장인(60) 한사람뿐이다. 서신정 장인은 2대 채상장이었던 아버지(서한규)로부터 배운 뒤 2012년에 국가 무형문화재(인간문화재)로 지정받았다. 2대 채상장 서한규옹이 2017년 3월,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면서 서신정 장인이 유일한 채상장으로 남아 있다.

“아버지는 저에게 채상장되기를 강요하지 않으셨어요. 제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지요. 적성에도 맞구요. 오래 공들인 제품이 완성품이 되어 나올 때, 그때 느끼는 희열과 행복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답니다”

채상작업은 대나무를 잘게 저미는 대오리작업과, 그것으로 제품을 만드는 두가지 과정을 거친다. 그래서 통상 2인 1조로 작업을 하는데, 딸은 아버지와 35년동안 짝을 이뤄왔다. 어머니는 이 방면에 관심도 없고 소질도 없어서 부녀가 호흡을 맞췄었는데, 인쇄업을 하던 남편이 전수자와 이수자과정을 거쳐 전수조교가 되어 지금은 부부가 2인 1조로 작업을 하고 있다.

크고 작은 채상품 6개를 1세트로 한 3합채상세트는 대오리작업에 20일, 제품 제작에 20일 등 총 40여일이 걸린다. 한해동안 꼬박 만들어도 12개 만들기가 쉽지 않은데, 날이 갈수록 주문량이 떨어져서 작년 한해동안 총 주문액이 2천만원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전통 채상기법을 응용한 가방
전통 채상기법을 응용한 가방

“채상작업이 재미있고 보람있는 일이긴 한데, 하면 할수록 전통 채상작품만해서는 살길이 막막하다는 걸 느끼면서 20여년 전부터 생활소품을 개발하기 시작했지요. 전통 공예품을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피크닉 가방에 브로치, 도시락통 등 50종 넘게 개발했는데, 인간문화재 중에서 이렇게 소품 아이템을 많이 개발한 사람은 아마 저밖에 없을 거에요(웃음)”

소품판매로 생계는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하는데, 그나마 담양 죽녹원 자락에 있는 채상장전수교육관(전남 담양군 담양읍 죽녹원로 119, 전화 061 381 4627)에서만 구입할 수 있어서 판로가 그만큼 제한적인 것도 극복해야 할 과제다.

작년엔 만들어 놓은 작품들도 있고 해서 6월에 서울 인사동에서 기획 전시회를 가졌는데 예상보다 반응이 좋아서 주문량을 소화하느라 12월까지 바빴다고 한다.

그렇다면 매년 전시회를 하면 재정문제가 좀 해결되지 않겠느냐고 하자, 채상작품은 제작공정이 까다롭고 제작기간이 길어서 매년 전시회를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한다.

채상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문화유산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직업으로 삼을 때 경제적으로는 여유있는 삶을 누리기 힘들다는 점에서 배우려는 사람도 매우 드문 편.

현재 채상의 명맥을 이으려는 전수자가 5명이 있고, 평균 5년 정도의 전수자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이수자가 1명, 이수자 과정까지 마친 전수조교가 1명 있다.

전수자에게는 매월 25만원, 전수조교에게는 월 66만원, 인간문화재인 채상장에게는 월 130여만원을 국가에서 지원한다. 지원액수가 매우 적지만 이수자에겐 그마저도 없다.

(왼쪽부터) 전수조교인 남편 김영관씨, 아들 김승우 이수자, 2대 채상장인 고 서한규 장인 그리고 서신정 장인
(왼쪽부터) 전수조교인 남편 김영관씨, 아들 김승우 이수자, 2대 채상장인 고 서한규 장인 그리고 서신정 장인

이중 이수자는 서신정 장인의 아들(김승우)이고 전수조교는 남편(김영관)이다. 인쇄업을 하던 남편이 채상장 전수조교가 되는 데에도 20여년이 걸렸다.

전수자, 이수자, 전수조교의 모든 과정을 수십년에 걸쳐 이수하여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된다 해도 월 130여만원의 지원을 받을 뿐 세제혜택은 물론 의료 및 건강보험 혜택도 없다. 채상장은 꼬박 앉아서 작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세월이 흐를수록 무릎 연골이 많이 닳는다고 한다. 서신정 장인의 무릎도 연골이 이미 거의 다 닳아 없어진 상태.

경제적으로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채상장의 길에, 아들이 뛰어든 것에 대해 서신정 장인은 “몹시 자랑스럽고 대견하다”고 한다.

“내가 아버지로부터 채상을 배웠듯이 나의 2세가 채상의 명맥을 잇기를 바랐습니다. 아들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채상’을 태교로 배운 아이지요(웃음)”

아들 김승우 이수자(30)는 서너살 때부터 엄마가 하는 일을 흉내내며 곧잘 따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 본격적으로 채상작업을 가르치자 금방 싫증을 내면서 “엄마, 나 안해! 이렇게 해서 먹고 살겠어?” 하면서 공부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학에서 건축학을 전공했다. 채상작업이 억지로 시킨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어서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군복무후 할아버지(서한규) 건강하실 때 채상작업을 배우고 싶다면서 1년 휴학을 하더니 그후 본격적으로 채상 장인의 길로 접어들었다.

“아들이 채상의 명맥을 잇겠다고 하니까 너무 기뻤습니다. 채상분야가 비록 돈을 벌 수 있는 분야는 아니지만 가치있는 일을 선택한 것이니까요. 그런 아들이 자랑스럽습니다”

정부의 관심도 미미하고, 일반인들로부터도 점점 멀어져가고 있는 세계적으로도 희귀한 채상 기술은, 이렇게 해서 명맥이 3대째 이어지게 됐다.

아들 김승우 이수자는 올해 채상작품으로 온라인 쇼핑몰을 개설해보려 하고 있다. 그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채상 소품을 구하려 해도 담양의 전시관까지 가야 하는 현실이 조금이나마 개선될 것같기도 하다.

채상 장인은 옛부터 많지 않았다고 한다. 공정이 복잡하고 까다로운 데다 판로마저 많지 않아서 채상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는 것. 당대에 한두명 정도씩 명맥을 이어왔는데, 정부에서 인간문화재를 국가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 시작한 1975년 이래 김동연 장인(1897~1984)이 초대 채상장, 1987년에 서한규 장인(1930~2017)이 2대 채상장이었고 서신정 장인(1960 ~ )이 2012년 3대 채상장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동연 서한규 전대 채상장들이 전통 기법에 충실한 채상작품을 선보여왔다면, 서신정 채상장은 여기에 현대기법을 더해 채상작품의 대중화와 현대화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채상장인의 길을 가면서도 전승공예대전에서 12차례나 수상할 정도로 예술성 또한 뛰어난 서신정 장인.

채상의 영역을 끊임없이 넓혀가는 그의 노력이,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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