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체육계 성폭행은 ‘10년 적폐’… 2차 피해도 그대로

<김주언 칼럼> 체육계 성폭행은 ‘10년 적폐’… 2차 피해도 그대로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9.01.24 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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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상해 등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가 23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상습상해 등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10월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된 조재범 전 쇼트트랙 국가대표 코치가 23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영통구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항소심 공판을 마치고 나오고 있다.

‘여자선수들이 있기 때문에 룸살롱을 가지 않는다.’ 한 코치의 말은 체육계에서 성추행이 암암리에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음을 말해준다. 심석희 선수가 성폭행 피해 사실을 고백한 이후 신유용 선수도 비슷한 사건을 폭로했다. 그것도 국가가 관리하는 시설인 선수촌에서도 이뤄진 것으로 밝혀졌다. 젊은 빙상인 연대는 빙상계의 더 많은 성폭행피해 사실을 공개했다. 지난해 열풍이 몰아쳤던 미투운동이 새해벽두 체육계로 옮겨 붙은 것이다. ‘스포츠 미투운동’이라고 할 만하다. 한국 사회는 또다시 충격에 빠졌다.

심선수는 17살이던 6년전부터 조재범 전코치로부터 폭행을 당했다고 고백했다. 심선수는 4년동안 태릉·진천선수촌 빙상장 라커룸 등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해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조 전코치로부터 무차별 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조씨는 이 사건으로 징역 10개월형을 선고받고 수감됐다. 그러나 조씨는 성폭행 사실을 전면 부인했다. 검찰은 구치소를 방문해 수사에 착수했다.

심 선수는 조씨의 항소심 공판에 증인으로 출석해 “조재범코치를 엄벌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자신은 물론, 아버지마저 심각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고 밝혔다. “스트레스 장애, 우울증, 불안 장애, 수면 장애로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성폭력 등으로 생긴 트라우마는 마음의 상처뿐 아니라 뇌에도 손상을 준다고 말한다. 기억이 반복적으로 떠올라 공포심을 느끼게 되며 평생 지워지지 않은 상처로 남는다는 것이다. 결국 불안 우울 악몽으로 정상생활이 어려워진다.

신유용 선수는 “심석희 선수의 폭로가 용기를 줬다”며 고1 때부터 성폭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코치가 4년간 20여차례 성폭행하고 협박까지 했다는 것이다. 신선수는 지난해 3월 가해 코치를 성폭행 혐의로 고소했다. 코치는 연인관계라고 주장했다. 신 선수는 “연인관계 주장은 거짓”이라며 “악몽같았다”고 호소했다. 그는 “유도는 저의 전부였기 때문에 사실을 폭로하면 유도인생을 끝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두려웠다”고 말했다. 그는 가해자가 50만원을 줄 테니 없었던 일로 해달라는 어이없는 태도 때문에 고소를 결심했다.

젊은빙상인연대는 21일 빙상계 성폭력 피해자 5명을 추가로 폭로했다. 특히 한국체대 전명규 교수가 가해자를 옹호했다고 주장했다. 빙상연대는 “피해자들은 신원이 공개될 경우 빙상계를 좌지우지하는 ‘전명규사단’으로부터 2차가해를 당할까 두려움에 떨었다”고 밝혔다. “빙상연맹은 ‘친 전명규 관리단체’로 변신하며 기득권을 유지했고, 한국체대는 전 교수에게 고작 감봉 3개월의 하나마나한 징계로 면죄부를 줬다.” 이들은 체육계 성폭력에 대한 전수조사와 한체대 감사, 대한체육회 수뇌부의 총사퇴를 요구했다. 전교수는 폭로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체육계 성폭력 문제가 열화처럼 들끓자 정부가 나섰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성폭력 가해자의 영구제명 등 처벌규정을 강화하고 국가인권위의 실태조사와 권고안을 도출하여 활용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선수촌에 인권상담사가 상주하고, 선수촌에 인권관리관 제도를 도입하는 방안도 포함됐다. 10년전 체육계 성폭력이 사회문제로 떠올랐을 때도 국가위원회 권고안이 나왔다. 그러나 10년 동안 하나도 개선되지 않았다. 국가인권위원회는 22일 근본적 개선방안을 내놓겠다고 다짐했다.

성폭력 사건은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매우 유사한 패턴을 보인다. 감독이나 코치가 선수에게 폭력을 행사해 항거하기 힘든 심리적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성폭행까지 저지른다. 참다못한 피해자가 폭로하면 가해자는 전면 부인한다. 증인으로 나서려는 동료도 없다. 결국 가해자는 제대로 처벌받지 않는다. 다시 감독이나 코치로 복귀한다. 피해자는 운동을 그만둔다. 엘리트 체육계의 오래된 관행과 환경이 변화하지 않았음을 잘 보여준다. 성적 우선주의를 앞세워 감독자에게 잘못된 권위를 부여했기 때문이다. 합숙훈련의 병폐도 나아지지 않았다.

체육계 성폭력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선정적 보도행태도 달라진 것이 없다. 언론보도를 통한 2차피해가 여전하다. 지난해 6월 한국기자협회와 여성가족부는 보도가이드라인 ‘성폭력·성희롱 사건, 이렇게 보도해주세요!’를 공동 제정해 발표했다. 그러나 가이드라인을 위배한 보도사례는 넘쳐나고 있다. 오죽하면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이 언론에 의한 2차 피해 예방을 호소하며 가이드라인 책자를 펼쳐 보였겠는가.

대표 사례가 피해자를 부각하여 피해자의 고통을 가중시키고, 성폭력의 심각성과 위해성을 희석시키는 보도행태다. 많은 언론매체는 조재범 전코치 보다 심석희 선수의 사진을 썼다. 아예 ‘심석희 사건’으로 부르기도 했다. 심지어 가해자를 영구 제명하자는 법안을 ‘심석희법’으로 명명했다. 가이드라인은 피해자를 내세우는 보도는 “가해자를 사건의 중심에서 사라지게 해 사건의 책임소재가 흐려질 수 있고, 피해자를 주목하게 만들어 외모 평가, 근거없는 소문 등 피해자에 대한 2차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물론 보도에 신중을 기한 매체도 있다. MBC는 ‘조재범 성폭행의혹 사건’으로 부른다. 한겨레는 신유용선수의 실명공개 위험성을 피해자에게 알린 뒤 동의를 얻어 보도했다. 경향신문은 사설에서 "이번 사건을 ‘심석희 성폭행의혹 사건’이 아닌 ‘조재범 성폭행의혹 사건’으로 부를 것을 제안한다"며 "가해자의 이름으로 사건 프레임을 짜는 것은 그 자체가 사회정의에 부합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사진 무단도용 사태도 있었다. 많은 매체가 신씨 SNS의 사진과 글을 도용해 기사화했다. 과도한 피해자신상 노출을 금지하는 보도가이드라인 위반이자 사생활 침해이다. 낯 뜨거운 선정성 보도도 줄을 이었다. ‘귀에 x까지 넣었다?’ ‘성폭행 후 생리했냐? 산부인과 가봐라 말 듣기도’ 등이다. ‘몹쓸 짓, 짐승, 악마, 더러운 욕망’ 등 관성적으로 잘못 써온 표현들도 많다. 성폭력범죄를 희화화하거나 사소하게 만들고 ‘억제못한 성욕 때문에 성폭력이 발생했다’는 통념을 강화하는 내용이다.

‘10년 적폐’ 체육계 성폭력을 없애기 위한 선수들의 용기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성폭력 범죄를 근절하려면 가해자 처벌과 인권교육을 강화하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 차제에 엘리트 체육 국가관리체제를 개선해야 한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에게 평생 연금을 제공하고 병역을 면제해주는 제도는 언제까지 존속시킬 것인가. 이와 함께 피해자의 2차피해를 막기 위한 제도의 도입도 검토해보아야 한다. 언론중재위원회나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적극 노력도 절실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언론 스스로의 노력이 우선돼야 한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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