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학기 칼럼> 나가사키의 겨울에는, 아직도 비가 내린다

<백학기 칼럼> 나가사키의 겨울에는, 아직도 비가 내린다

  • 기자명 백학기
  • 입력 2018.12.20 0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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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원폭 평화공원
나가사키 원폭 평화공원

 12월 한 해가 저무는 달에 일본 나가사키 만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청량하다. 큰 선박들이 떠있는 항구와 이를 감싸고 있는 해협, 그리고 이를 병풍처럼 둘러서 내려다보고 있는 산 능선에 자리잡고 있는 밀집된 주택들. 막 태평양 어딘가에서 당도한 대형 배들이 느릿느릿 항구로 들어오는 시각. 바람은 늦가을처럼 청량하고 외지에서 온 여행객들에게 이국적인 풍경을 듬뿍 선사한다.

일본에서 가장 이국적인 도시로 불리는 나가사키로의 겨울여행은 뜻하지 않게 이루어졌다. 북큐슈(키타큐슈)를 향해 떠난 일행은 여행 도중 온천보다는 슬픈 비극을 간직한 원폭의 땅 나가사키를 방문하자는 제안에 모두 동의했다. 북큐슈에서 나가사키까지 특급열차로 두시간 반. 나가사키의 여정은 원폭의 땅을 둘러보고 한편으로는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지를 보자는 두 개의 테마로 이루어졌다.

나가사키의 관문인 나가사키 역은 12월의 날씨와 다르게 늦가을의 청량함을 머금고 있었다. 가로수 잎들이 이제서야 붉게 익어갔다. 역 앞 광장을 빠져나오자 눈에 띈 것은 낮고 조용한 소리로 철길을 미끄러져가는 컬러풀한 전차(트램)들이었다. 복잡한 선로를 서로 부딪힘없이 교행하는 나가사키 전차들의 풍경은 마치 우리를 1930년대 어느 근대의 시간으로 이끌었다.

장면# 1

폴 글린의 <나가사키 노래>는 그때 그 순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 B-29 한 대가 구름을 뚫고 나오는 것을 목격했다. 검은 폭탄을 토해내는 순간 무시무시한 빛이 번쩍이더니 온 천지가 그야말로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갑자기 위로 올라갈수록 넓게 버섯 모양으로 퍼지면서 거대한 연기 기둥이 치솟았다. 바로 그때였다. 무서운 속도로 바람이 불어오더니 집이며 건물이며 나무들이 거대한 불도저에 밀리듯 무너져 내렸다.”

나가사키 원폭 기념관과 평화공원에 12월의 비가 내렸다. 내리는 비속에서도 그날 그때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들로 언제나 발길이 이어진다. 영국작가 새뮤얼 버틀러는 “잊혀지지 않는 자는 죽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고, 영국 여류시인 에디뜨 시트웰(Edith Sitwell)의 “아직도 비가 내린다.”는 이를 두고 한 말일까. 원폭 기념광장의 수많은 발길은 평일임에도 엄숙하며 장대한 행렬을 이루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에 이은 두 번째 원폭 투하 나가사키 현장은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처럼 참배객들의 고요와 침묵의 시간으로 남아 있다.

이번 나가사키 방문을 통해 새롭게 안 사실은 일본의 두 번째 원폭 투하 지점은 당초 나가사키가 아닌 북큐슈(키타큐슈) 고쿠라(小倉)지역이었으나 구름 낀 날씨와 가솔린 파이프가 막히는 바람에 기수를 남서쪽으로 돌리면서 발생했다는 놀라운 사실이다. 참혹한 나가사키 원폭 역사는 이렇게 우연한 상황에서 비롯됐다. 아이러니다.

장면#2

나가사키는 18~19세기 서양문물과 외국인들의 생활양식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는 관광지들이 많다. 지난 2006년에 개관한 역사문화박물관은 해외 교류의 창구로 널리 알려진 나가사키의 해외교류사를 한 눈에 일별할 수 있는 자료와 각종 미술공예품들이 집결돼 있어 발길을 끈다. 네덜란드를 비롯 중국과의 교류 등 나가사키의 독특한 분위기가 관광객들의 이목을 집중시킨다. 이중에서도 나가사키항이 한 눈에 보이는 낮은 언덕 위 그라바공원은 단연 돋보인다. 스코틀랜드 상인 출신의 토마스 글로버의 목재저택을 비롯해 이 공원 안에는 옛날 미츠비시 조선소 승무원들의 휴식과 숙박장소 등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히 글로버의 일본식 발음인 그라바 저택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가옥이다. 오페라 <나비부인>의 배경지로 유명하다. 이 공원에는 나비부인 작곡가인 풋치니와 프리마 돈나 일본 오페라 가수 미우라 타마키 동상이 서 있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그라바 공원 안에는 일본 근대산업에 기여하고 신 시대로의 문을 연 위인들의 발자취와 생활 모습이 적나라하게 남아 있다. 이들의 면모를 훑어보다 일본 최초의 서양요리 식당에 들러 나가사키 항을 내려다보며 차 한 잔을 마시면 우리 아픈 식민지의 역사가 어제 일인 듯 떠오른다. 강제 징용된 조선인들의 사무친 원한과 분노가 묻혀 있는 군함도(하시마섬)가 이곳 나가사키에서 멀지 않다. 나가사키의 뱃고동 소리를 들으며 그 시대의 가시지 않은 아픔과 통곡들이 환청처럼 들려오는 듯 하다. 아직 끝나지 않은 저 원폭의 참상처럼 귓가를 내내 맴돈다. 에디뜨 시트웰의  "아직도 비가 내린다(Still falls the Rain)" 시의 ‘ 아직도 그대를 위한 나의 순결한 빛, 순결한 피가 흐른다(still shed my innocent light, my blood for thee)’ 구절이 떠오른다. 나가사키 항은 그렇게 또 한 해 저물어간다.

백학기(시인ㆍ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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