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논설주간 제17회 송건호언론상 수상

김주언 논설주간 제17회 송건호언론상 수상

  • 기자명 박상건 기자
  • 입력 2018.12.14 17:04
  • 수정 2018.12.16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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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 이유 “불의에 순응한 언론계에 경종, 민주화 앞당겨” 18일 시상식

[데일리스포츠한국 박상건 기자] 언론계의 산증인 김주언 데일리스포츠한국 논설주간이 18일 제17회 송건호언론상을 수상한다.

1989년 12월 국회 언론청문회에 참석한 당시 김주언 서울경제신문 기자, 김태홍 한겨레신문 이사, 신홍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1989년 12월 국회 언론청문회에 참석한 당시 김주언 서울경제신문 기자, 김태홍 한겨레신문 이사, 신홍범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1980년대 전두환 정권 때 ‘보도지침’이라는 것이 있었다. 당시 문화공보부 홍보조정실은 특정 사안의 보도 여부와 보도 방향, 기사의 크기를 정해 언론에 보도토록 했다. 이 희대의 언론 통제 시스템의 상징인 보도지침은 1986년 한국일보 김주언 기자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다. 당시 김주언 기자는 전두환 정권의 ‘보도통제 가이드라인’인 이른바 보도지침을 <월간 말>에 전달해 세상에 폭로했다.

당시 김주언 기자가 폭로한 내용은 1985년 10월부터 1986년 8월까지 10개월 동안 보도지침 584건의 구체적인 사례를 모은 것이었다. 김주언 기자는 이런 내용을 복사해서 <월간 말>에 전달했다. 그 사례들은 ‘보도 불가’ 46.1%, ‘정권 홍보성 보도 요구’ 24.5%, ‘축소 보도’ 16.1%, 용어사용 불가 6.9% 등 보도통제의 내역이 적나라하게 적시돼 있었다.

김주언 논설주간은 “보도지침은 당시 송건호 선생님이 의장으로 있던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에서 폭로한 것이었다. 송건호 선생님을 비롯한 민언협 활동가들의 헌신이 없었으면 묻혀버렸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했다.

김주언 주간은 1심에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1년·자격정지 1년을 받고 풀려나 1995년 대법원에서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당시 학생운동이나 재야운동 중에 연행되면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에 대해 김주언 논설주간은 “당시 고초를 고려해 폭로한 건 아니었다”면서 “지금도 후회는 없다. 다만 가족들에게 미안했다. 폭로 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인권운동가들이 연대해줘서 외롭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1986년 9월 9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전두환 정부의 보도지침 자료를 공개하는 모습.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는 문화공보부에서 각 언론사에 하달한 보도지침 월간 말지에 폭로했다(사진=민주언론시민연합)
1986년 9월 9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와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전두환 정부의 보도지침 자료를 공개하는 모습. 김주언 당시 한국일보 기자는 문화공보부에서 각 언론사에 하달한 보도지침 월간 말지에 폭로했다(사진=민주언론시민연합)

특히 재판을 받으면서 한승헌 변호사, 고 조영래 변호사, 황인철 변호사, 조준희 변호사, 홍성우 변호사, 김상철 변호사, 고영구 변호사(전 국정원장), 황정호 변호사, 이상수 변호사, 신기하 변호사 등 쟁쟁한 변호사들로 구성된 드림팀 변호인단이 그를 변론했다.

김주언 논설주간은 “보도지침 사건은 노태우 정권을 거쳐 김영삼 정부 때 최종 판단이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판사들이 판단을 계속 미뤘고 재판부가 대여섯 번 바뀌며 9년의 시간이 흘렀다”면서 “사회가 민주화됐다고 하지만 사법부는 그렇지 못했다. 지금도 사법부는 별반 달라지지 않아 보인다.”라고 질타했다.

송건호 선생의 유지를 전승하는 청암언론문화재단은 김주언 논설주간을 선정한 이유에 대해 “보도지침 폭로 사건은 당시 정권의 비도덕성과 반민주성을 고발하는 동시에 불의에 순응하는 언론계에 경종을 울려 언론인의 각성을 촉구한 의거”라고 평가했다.

청암재단은 “고난을 각오한 김주언 기자의 용기 있는 행동은 국민적 공분과 저항을 일으켜 이 땅의 민주화를 앞당겼다”면서 “수상자는 98년 해방 이후 최대의 언론운동 연대단체인 ‘언론개혁시민연대’를 조직하고 출범시키는 실무책임을 맡았고 언론관련 법·제도 개선운동, 미디어 수용자운동 등을 벌였다”고 밝혔다.

섬여행을 즐기는 김주언 논설주간. 신지도에서
섬여행을 즐기는 김주언 논설주간. 신지도에서

김주언 논설주간은 수상소감에서 “보도지침은 단지 박정희-전두환 독재정권 시절에 존재했던 과거 사례가 아니다. 박근혜 정권 시절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이 김시곤 KBS 보도국장에게 세월호 참사 보도에 시시콜콜하게 간섭했던 사실이 공개됐다. 언론은 이를 ‘신보도지침’이라고 명명했다”고 지적했다.

김주언 논설주간은 한국일보 기자, 한국기자협회장, 언론개혁시민연대 사무총장, 한국언론재단 연구이사, 신문발전위원회 사무총장, KBS 이사 등을 역임했고 현재 내부제보실천운동 상임대표, 언론광장 감사, 사단법인 섬문화연구소 고문을 맡고 있다. 보도지침 폭로 이듬해 가톨릭자유언론상(1회), 안종필자유언론상(1회)을 받은 바 있다.

한편, 청암 송건호 선생은 험난한 민주화와 언론변혁의 선구자이다. 한국기자협회가 전국 기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여론조사에서 장지연 선생과 함께 20세기 최고의 언론인으로 뽑혔다. 송건호 선생은 1962년 민국일보 논설위원으로서 남대문이라는 칼럼을 집필하면서 정보과에 불려가기를 반복했다. 1년 후 경향신문 논설위원이 된 그이는 박정희 정권이 정권연장을 발표하자, 이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편집국장에 취임해서는 “신문의 정도를 걷자. 문제가 생기면 모든 책임을 국장에게 넘겨라.” 독재정권에 대한 선전포고, 언론자유를 향한 선전포고였다.

1974년 동아일보 편집국장 시절은 언론탄압이 극에 달했고, 3선개헌으로 장기집권의 발판을 마련한 박정희 정권은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모든 행위는 보도할 수 없도록 했다. 언론사에는 기관원들이 상주하고 거의 모든 기사에 관여했으며 걸핏하면 기자들이 남산 중앙정보부에 끌려가기가 일쑤였다. 송건호 편집국장은 서울대 농대생들의 유신반대 시위를 기사화 했고 바로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10월 24일 오전 9시 15분 동아일보 직원 180여명은 언론인 스스로가 자유언론 투쟁을 벌여나가자며 이른바 자유언론 실천선언을 했다. 150여 명이 해고되었다. 송건호 선생은 중앙정보부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던 김상만 사장과 이동욱 주필에게 강한 불만을 쏟아냈다. “부하 기자들의 목을 치면서 더 이상 이 자리를 지킬 수 없다. 이렇게 하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 뒤 사표를 내던졌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84년 언론운동의 전초기지격인 민주언론운동협의회(민언협)을 결성, 초대 의장이 되었던 선생은 <말>지 창간, 발행인이 되었다. 그 때 보도지침을 폭로해 권력의 시녀로 전락한 한국 언론의 실상을 전 세계에 폭로했다. 그리고 김수환 추기경, 소설가 황순원씨 등 각계원로 24명과 새 신문 창간의 당위성을 역설하고 국민적 지원을 당부하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전국에서 2만 7천 52명의 국민 주주들이 기꺼이 동참했다. 그렇게 온 국민의 땀방울이 축축이 적셔진 50억원의 밑천으로 세계 언론사의 한 획을 그었던 한겨레신문은 창간되었다. 송건호 선생은 정직하지 못한 역사 앞에서 한 번도 무릎을 꿇지 않았던 참 지성의 사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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