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은경 칼럼> 탈진실 시대의 레토릭, ‘유체이탈 화법’

<한은경 칼럼> 탈진실 시대의 레토릭, ‘유체이탈 화법’

  • 기자명 한은경
  • 입력 2018.12.13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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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55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7일 오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제55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서 축사하고 있다.

 

불과 일주일 전쯤의 국내 한 일간지 사설이다. 내용인즉, 문재인 대통령이 ‘무역의 날’ 축사에서 ‘수출 1조 달러 시대’를 열자며 제조업의 활력과 불굴의 기업가 정신을 다시 한 번 촉구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약 14분간의 축사 대부분을 개방과 통상, 제조업 강국, 시장 개척, 수출 역량 같은 용어를 써가며 수출 확대와 산업 경쟁력 이슈에 할애했다. “정부도 무역인 여러분과 함께 하겠다”고 했다. 이것뿐이라면 ‘무역의 날’ 축사에서 으레 반복되는 내용이다. 너무나 흔한 얘기라서 한 나라의 일간지 사설에 오를 만한 내용도 아니다. 그러나 그 사설을 읽다 보면 반전이 기다린다. 약간 압축해서 인용하면 이렇다. “문 대통령의 축사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정부의 실제 행동은 그 반대이기 때문이다. 수출 대기업 및 재벌 기득권 적폐, 규제혁신은커녕 대폭 강화되는 공정위의 대기업 규제, 대주주 경영권 약화를 노리는 갖가지 법안, 주 52시간제 강행에서 법인세 최고세율 인상까지 기업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정책, 기업임원을 피투성이가 되도록 두들겨 패도 치외법권을 향유하는 민노총, 이런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제조업 활력’을 강조하고 ‘기업가 정신’을 주문하니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정도면 악의에 가득 찬 가짜뉴스라고 청와대로부터 공격 받지 않을까 내심 궁금했으나 지금까지 풍파는 물론이고 언쟁이 일어날 조짐조차 전혀 없다. 결국 이런 팩트는 부정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문 대통령을 ‘맥락상실’이나 또 다른
‘병적 증상’으로 치부하고 말일은 아니다. 오히려 왜 문 대통령이 여태껏 자신이 추진해온 정책과 앞뒤 맥락이 맞지 않는 논리를 펴고 다니는지 그 속내를 한번 되짚어볼 문제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문 대통령의 일명 ‘유체이탈 화법’은 오히려 탈진실 정치가 요구하는 레토릭의 모범적인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탈진실의 정치는 마치 아이돌 그룹의 공연과 유사하다. 무대에서 어떤 일들이 실제 벌어졌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대중들의 눈요기를 충족시키고 높은 시청률을 확보하면 그만이다. 겉보기와는 달리 무대장치가 실제로는 시시껄렁했다고 따지는 자는 그 무대에서 하차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조명의 화려함과 웅장한 음향이다. 사실이야 어쨌든 공연장의 겉모습은 흥분과 환호의 도가니처럼 대중의 눈에 비쳐져야 한다. 그로 인한 대중의 만족과 지지 외에 다른 중요한 것은 없다. 탈진실 정치는 이와 같이 진짜 무대의 속내를 감출 수 있는 강력한 조명과 음향기기, 첨단 디지털기술 등과 같은 ‘대체적 사실’을 생산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진 사회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대체적 사실이 ‘실제적 사실’을 대신하고 사실여부를 떠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대중의 감수성이 진실보다 더 큰 무게를 지닌 사회가 바로 탈진실 사회이다. 바꿔 말하면 다름 아닌 대중이 바로 탈진실 정치를 요구한다.

그렇다면 탈진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실관계를 떠나 자기가 원하는 생각을 진실이라 우기는 억지일까? 단순히 대중의 망상일까? 아니면 낯짝 두꺼운 거짓말이나 거짓 공약일까? 탈진실은 그 모두일 수도 있고 그 모두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탈진실 정치는 사실적 증거나 진실에 관계없이 자기들이 믿는 그 무언가를 대중에게 믿도록 강요하려는 이데올로기적 패권주의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탈진실 정치는 과거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 모택동주의와 같은 전체주의적 이데올로기에 그 맥락이 닿아 있다. 그들은 기본적인 사실관계를 부정하거나 극히 일부분의 정의롭지 못함을 전체인양 공격하면서 자신들이 신봉하는 세계로 들어가는 로드맵을 제시한다. 시장경제의 일부 부작용을 더 이상 용납 못할 ‘악’으로 부풀리면서 시장경제 자체를 부인하는 로드맵을 제시한다. 이러한 탈진실 정치는 과거처럼 소수의 전위 혁명분자의 은밀한 선전선동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전통적인 미디어의 퇴조와 소셜 미디어, SNS의 등장이 탈진실 정치의 기반이다. 그 위에 탈진실의 씨앗만 뿌려 놓으면 대중들은 알아서 서로를 부추긴다. 그래서 탈진실 정치는 유사 진실과 핵심을 모호하게 가리는 유체이탈 화법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도구로 삼고 있다.

문 대통령의 레토릭은 얼핏 보기에 유체이탈 화법이라고 비판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의 말을 모두 해체한 후에 다시 재조립하면 매우 정연한 두단계의 논리가 도출된다. 1단계는 절대다수의 투표권을 지고 있는 노동자, 농민, 도시 빈곤층 및 서민을 겨냥한 레토릭이다.”대기업과 재벌 기득권은 적대시되어야 하며, 이를 위한 규제는 더욱 강화 되어야 한다. 대주주 경영권은 약화되어야 하고 기업임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아도 노동자의 권리는 더 보호 받아야 한다.” 이것이 다수 계층을 포섭하는 레토릭이다. 2단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은 ‘수출 1조 달러’를 달성해야 한다. 정부도 무역인, 즉 기업인 여러분과 함께 하겠다” 경제를 책임지고 여론을 형성하는 중산층 이상의 소수 계층을 노리는 레토릭이다. 그리고 이것이 문 대통령이 바라는 모든 국민을 만족시키는 진정한 포용국가이다. 이것이 기업의 기를 좀 살려 달라는 재계의 주장을 ‘한탄스럽다’고 하면서도 ‘수출 1조 달러 달성’을 강조하고 ‘제조업 활력’과 ‘기업가 정신’을 주문하는 진정한 맥락이다. 매우 논리 정연하다. 앞뒤 맥락이 딱 맞지 않는가!

한은경(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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