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빈 들판, 그래도 지는 해 바라보고 뜨는 해 바라 봐야지요?

겨울 빈 들판, 그래도 지는 해 바라보고 뜨는 해 바라 봐야지요?

  • 기자명 박상건 기자
  • 입력 2018.12.0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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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건의 시와 풍경 있는 아침] 15 박남철, ‘들판에 서서’

어쩌리, 들판에 서면 떠나지 못하네

작은 가슴 미어지게 들판이 비어가면

설움 깊어져서 못내 돌아보고

떠나지 못하는 무엇이 있을까

기어이 뿌리치지 못하는

정든 것이 있었을까

 

노여움이었구나

똑바른 정을 다해 들판을 키웠는데

거름내고 흙을 갈고 씨 뿌리고 김을 매며

땀 흘리던 저 일손들, 들판을 채우던 저 알곡들

어느 것 하나 성하지 못하니

들꽃들 스스로의 허리꺾고

흩어져서는 울고 있는지

눈물 감추며 더욱 아픈 마음들

부르면 달려오는 것일까

 

들판에 가면 이제 알겠네

‘저 건너 묵은 밭에

쟁기 벌써 묵었느냐

임자가 벌써 묵었느냐’

빈 들판 울러대는 찬 바람 잠 재우며

거기 씨 뿌리던 어머니의 손길

떠나지 못하고 묻어 나오는지

태어나서 오직 한길 들판에 호미로 사시던 이

어째서 어머니는 빈 들판이 되셨는지

 

(중략)

 

지는 해 바라봐야지요 그러믄요

뜨는 해 바라봐야지요 손뼉쳐야지요

 

- (박남철, ‘들판에 서서’ 중에서)

 

겨울들판
겨울들판

저무는 한해 끝자락. 허수아비도 눈물에 젖어드는 텅 빈 겨울들판. 그 들판에 서서 “기어이 뿌리치지 못하는/정든 것이 있었을까” 아무 것도 없는 들판에 “흩어져서는 울고 있는지/눈물 감추며 더욱 아픈 마음들/부르면 달려오는 것일까”

“들판에 가면 이제 알겠네/거기 씨 뿌리던 어머니의 손길/떠나지 못하고 묻어 나오는지/태어나서 오직 한길 들판에 호미로 사시던 이/어째서 어머니는 빈 들판이 되셨는지” 어째서 어머니는, 우리 어머니는...

비료 값 걱정, 품삯 걱정으로 흐르던 시간들. 풍년이면 풍년인 채로 흉년이면 흉년인 채로 매한가지로 살아온 날들. 그래도 저 들녘을 떠나지 못하는 건 “짓밟혀도 깨어져도 피 뚝뚝 흘려도/봄이면 새싹 틔워 우리 힘 되어준 땅” 때문이다.

“그 순종을 미덕이라”하시며 “들판 믿고 당당히 살아야 할/떳떳이 물려주어야 할 내 땅이기에/힘차게 두 팔 걷고 꽉 찬 들판 키워내며” 살아온 세월. 빈 들판은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다 털어 내주었지. 남은 볏짚 겨울나기 지붕으로, 장독대 감싸 안아주었지.

가난해도 그렇게 사랑으로 믿음으로 살아왔지. 그래 그렇게 “지는 해 바라봐야지요 그러믄요/뜨는 해 바라봐야지요 손뼉쳐야지요”. 내 사랑하는 들판과 알알이 영글어가며 동행해야지요.

글, 사진: 박상건(시인. 동국대 언론정보대학원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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