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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언 칼럼>92년만에 건국훈장 추서된 일본 여성혁명가
  • 김주언 논설주간 ysk7474@daum.net
  • 승인 2018.11.29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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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의사(오른쪽)와 부인 가네코 후미코 여사..(박열의사기념관 제공)

“재판장! 자네도 수고했네. 내 육체야 자네들이 죽일 수 있지만 내 정신이야 어찌하겠는가.”

일제강점기인 1926년 3월 25일 일본 도쿄 재판정.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가 외친 말이다. 박의사의 일본인 아내 가네코 후미코(한국이름 박문자) 여사는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불렀다. 일왕 암살음모 혐의 ‘대역사건’ 공판에서 재판장이 사형을 선고하자 일어난 일이다. 정리들은 박의사 부부의 입을 틀어막고 강제로 끌고 나갔다. 박 의사에 이어 가네코 여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옥사한 지 92년만이다. 일본인으로서는 두 번째, 일본 여성으로서는 처음이다.

법정에서는 또다른 기이한 장면이 연출되기도 했다. 피고인 남자는 사모관대에 조선관리의 예복인 조복(朝服)을 차려입고 사선(紗扇)까지 들었다. 여자는 흰 저고리와 검은 치마 차림에 머리까지 조선식으로 쪽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우리는 조선인이므로 재판도 조선말로 할 것이니 통역을 허락하라”고 요구했다. 법정에 선 남녀는 박열과 가네코 부부였다. 두 사람은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일본제국주의와 천황제에 저항했다. 1923년 9월 간토 재지진 때 ‘불령선인’으로 체포됐다가 폭탄입수 계획이 드러나 사형이 선고된 것이다.

가네코 여사는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생이다. 부모에게 양육을 거부당하여 출생신고마저 되지 않은 무적자였다. 따라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1912년 한국에 들어와 약 7년 동안 충청북도 청원군 부용면 고모집에서 지낸다. 그제서야 부강심상소학교를 다녔다. 이때 3ㆍ1운동을 목격한 그는 조선인들의 독립의지를 확인하고 동감했다. 1919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사회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1922년 도쿄에 유학중이던 문경출신 박열 의사를 만난다. 당시 박 의사는 인력거를 끌며 고학을 하고 있었다.

어느날 잡지에 게재된 박열의 시 ‘개새끼’를 읽고 감명받은 가네코는 그를 찾아가 동거하며 함께 아나키스트 운동에 나선다. 이들은 비밀결사 ‘불령사’를 조직하고 일본제국주의와 천황제에 저항했다. 간토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내각은 흉흉한 민심을 달래기 위해 조선인의 폭동사건을 조작한다. 자경단이 조선인들을 학살하는 사태에 이르자 이른바 ‘불령선인’을 잡아들여 사태를 수습하려 한다. 이들도 이때 체포됐다. 심문과정에서 폭탄입수 계획이 드러나자 일본내각은 조선청년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해 재판에 넘긴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 열흘 뒤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대역사건으론 이례적이었다. 뒷날 두 사람이 옥중에서 찍은 사진이 공개되면서 사진촬영을 허가한 판사가 사퇴하고 와카쓰키 내각이 무너지기도 했다. 가네코는 일본의 집요한 전향공작을 뿌리쳤다. 끝까지 아나키스트를 고집한 것이다. 그는 1926년 7월 23일 교살된 시체로 발견됐다. 형무소는 사인을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형무소가 사인 규명과 시신 인도 요구를 거부해 타살의혹이 짙다. 당시 가네코의 나이는 고작 스물세 살에 불과했다.

부부의 변호인으로 두 사람의 옥중결혼 수속을 대신했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그의 유골을 수습했다. 두 사람은 사형선고를 이틀 앞둔 3월 23일 옥중에서 혼인신고서를 제출해 합법적 부부가 됐다. 가네코는 재판정에서 “나는 박열을 사랑한다. 그의 모든 결점과 과실을 넘어 사랑한다. 우리 둘을 함께 단두대에 세워 달라. 함께 죽는다면 나는 만족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네코의 유골은 박 의사 선산인 경북 문경 주흘산 자락 팔영리 중턱에 묻혔다. 이후 2003년 박열 의사기념공원 안 산기슭으로 옮겨왔다.

박열 의사는 해방직후인 1945년 10월 27일 석방됐다. 그는 1946년 백범 김구선생의 부탁으로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유해봉환에 앞장서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재일조선거류민단을 창단하고 단장이 되어 1949년 5월 귀국할 때까지 도쿄에 머물렀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뒤 납북됐다. 1974년 1월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장 박열은 북한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국 정부는 1989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가네코는 여사는 ‘독립운동가 박열을 사랑한 일본인’으로만 알려져 서훈대상에서 제외됐다.

일본인으로서 처음 건국훈장을 받은 사람은 바로 이들의 변호를 맡았던 후세 다쓰지 변호사였다. 후세 변호사는 당시 조선인 아나키스트들과 연대한 대표적 반전활동가였다. 그는 일본제국주의를 비판하고 일본의 조선인 토지강탈에 대항해 조선인을 변호하기도 했다. 그는 해방 직후 “조선인들의 독립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날은 나에게도 자유의 날이다”라는 축하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건국훈장이 추서된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1년 만인 2004년이었다. 이제 식민지(한국) 해방을 위해 힘써온 종주국(일본) 혁명가가 두 사람으로 늘었다.

가네코 여사에게 건국훈장이 추서된 것은 그에 대한 연구가 축적되고 전기와 옥중수기가 소개됐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독립운동이 새롭게 조명됐다. 그는 옥중에서 지나온 삶을 담담히 기록했다. 훗날 그의 친구들이 원고를 모아 책으로 펴냈다. 책에는 일제의 폭압에 시달리던 조선인의 비참한 삶에 대한 연민과 3ㆍ1운동을 지켜본 감격의 기억이 담겨 있다. 지난해 개봉된 영화 ‘박열’도 일조했을 것이다. 영화에서 가네코 여사 역을 맡았던 배우 최희서는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가네코 여사의 무덤은 박열 의사 기념공원에 들어서면 왼쪽 산기슭에 있다. 외로운 유택에는 훈장이 놓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삶과 죽음을 기리는 것은 훈장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고작 23살에 삶을 마감한 일본인 여성혁명가가 대한민국의 해방투쟁사에 당당히 오른 것은 길이길이 기억돼야 한다. 이를 계기로 외국인 독립유공자의 발굴이 매우 중요한 과제로 떠올랐다. 중국 미국 등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벌인 독립운동가들을 도왔던 귀중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의 국제적 연대와 세계사적 보편성을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김주언(논설주간ㆍ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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