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언 칼럼> 강제징용 피해배상 판결과 일본의 치졸한 반격

<김주언 칼럼> 강제징용 피해배상 판결과 일본의 치졸한 반격

  • 기자명 김주언 논설주간
  • 입력 2018.11.22 07:59
  • 수정 2018.11.22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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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역 광장에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상.
서울 용산역 광장에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상.

“어머니 보고 싶다.” “고향에 가고 싶다.” 서울 용산역 광장에 세워져 있는 강제징용 노동자상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다. 고향을 향한 그리움이 묻어나는 가슴 뭉클한 말이다. 동상은 일제강점기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노동자를 기리기 위해 지난해 8월 건립됐다. 고된 노동으로 깡마른 남자가 곡괭이를 든 모습을 형상화했다. 오른쪽 어깨에 올려져 있는 새는 자유를 위한 갈망을 상징한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사과나 반성은 한마디 없다. 오히려 강제징용 역사를 지우려 한다.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 배상판결 이후 일본의 대응을 보면 그렇다.

대법원은 최근 일본기업이 한국의 강제징용 피해자들에게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소송을 제기한 지 13년 8개월이 지나서야 마침내 승소한 것이다. 대법원은 5년이나 재판을 미뤄왔다. 이 과정에서 사법농단의 주역인 양승태 전대법원장이 박근혜 전대통령과 재판거래를 한 정황마저 드러났다. 청와대와 사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파렴치한 일이 저질러진 것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워 일제의 만행을 폭로하고 손해배상을 주장하는 피해자들의 절규를 외면했다. 촛불항쟁 당시 ‘이게 나라냐’는 구호가 실감난다.

일본은 전방위적으로 터무니없는 행동에 나섰다. 가해자인 신일철주금에 무대응지시를 내리고, 세계각국에 한국을 국제법까지 어긴 나라로 매도하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고노 다로 외무상은 반발성명을 일본어와 영어로 냈다. “일한 우호협력관계의 법적 기반을 근본부터 뒤집는 판결로 극히 유감이며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주장이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아랍권까지 일본 대사관과 영사관 등 재외공관에 일본 정부의 주장을 적극적으로 전파하도록 훈령을 내렸다.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는 욱일기를 든 극우단체들이 연일 혐한시위를 벌였다. “한일 기본조약을 준수하지 않는 한국과 단교하자” “다케시마(독도)를 돌려줘”라는 틀에 박힌 구호도 등장했다. 방탄소년단(BTS)의 TV 아사히 출연이 취소되고 NHK와 후지TV도 BTS의 연말특집 출연계획을 백지화했다. BTS 멤버 지민이 입었던 티셔츠에 애국심과 해방 등 영어단어와 광복절과 원폭투하 사진이 담겨 있다는 점을 문제삼았다. 2년전 팬이 선물한 ‘광복 티셔츠’였다. 그것도 1년전에 찍은 것이다. 일본 극우세력은 ‘원폭 티셔츠’라고 주장했다.

전세계 주요 언론들도 즉각 반응했다. 미국 CNN과 영국 BBC 가디언, 중동 알 자지라 등이 해당소식을 전하면서 일본의 전범행위까지 소개했다. CNN은 “수백만의 한국인은 일본의 점령으로 고통을 겪었고, 일본이 2차대전 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공격을 당해 격퇴된 후 해방됐다”고 소개했다. BBC도 광복절 역사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노동자 문제까지 설명했다. 알자지라는 “일본과 한국의 관계는 1910~1945년 일본의 잔인한 한반도 지배로 인한 분쟁으로 계속 악화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에 대해 ‘최악의 자충수’라는 지적도 나왔다.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세계언론에 이번 상황이 보도되면서, 전세계의 젊은 팬들에게 ‘일본은 전범국’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구석에 몰리다보니 일본언론들이 생트집만 잡고 있다. 요즘 일본정부와 언론은 매우 다급해 보인다. 감추려고만 했던 역사적 진실이 하나하나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는 “방탄소년단을 대하는 일본을 보며 ‘많이 쫄았구나’ 하는 생각밖에 안든다”고 꼬집기도 했다.

BTS 팬클럽 아미는 “지민의 티셔츠는 ‘원폭 티셔츠’가 아니라 ‘광복 티셔츠’”라며 “일본의 원폭을 축하하는 게 아니라 한국 사람들이 맞은 광복절을 기뻐하는 것”이라고 바로잡았다.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은 당시 일본 지배하에 있던 아시아의 모든 나라 사람들에게 독립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유럽에 있는 수많은 홀로코스트 추모비를 두고 독일은 ‘반독일’이라고 하지 않지만, 일본은 한국 등에 있는 위안부 기림비를 ‘반일’의 상징으로 여긴다는 뜻이다.

일본은 독일과 달리 전범국가로서의 책임을 방기해왔다. 일본이 1년전 티셔츠 사진에 대해 새삼 문제삼는 것은 전쟁의 주범임은 반성하지 않고 원폭의 피해자임을 강조해온 것과 같은 맥락이다. 일본 정부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역사를 왜곡시키려는 시도를 서슴지 않는다. 강제징용 피해자들을 ‘옛 조선반도(한반도) 출신 노동자’로 통일하기로 한 것도 그중의 하나이다. 그동안 공식문서에서 사용해온 ‘옛 징용공’, ‘옛 민간인 징용공’ 등을 더이상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일본정부는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문제는 1964년 체결된 한일청구권 협정에 따라 한국에 유무상 경제지원을 제공하면서 “이미 해결됐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아베 신조 총리는 한국 대법원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손해배상소송을 낸 원고들은 당시 ‘징용’이 아니라 ‘모집’에 의해 일본에 일하러 왔던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일본정부가 징용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표현에서 ‘징용’을 빼기로 한 것은 징용의 불법성이나 비인간성이 부각될 수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일본이 강제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의 진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분명한 역사왜곡이다. 일본정부가 제국주의시절 침략 및 만행의 흔적을 지운 역사교과서를 채택토록 한 것은 이를 잘 말해준다. 중국은 얼마전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중국사로 편입시키려 했다. 만리장성도 한반도까지 연결시켜 놓았다. 동북아의 역사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역사전쟁은 피를 튀기며 싸우는 영토전쟁보다 훨씬 더 영향을 미친다. 역사는 기록을 통해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머물며 한 나라의 정통성을 좌우할 수도 있다.

문제는 일부 국내 식민사학의 후예들이다. 이들은 우리의 역사기록을 중국이나 일본의 논리로 구성하려고 한다. 조선시대 사대주의자들은 물론, 일제강점기의 식민사학자들은 왜곡 조작된 사실(史實)을 진실처럼 둔갑시켜 놓았다. 특히 식민사학자들은 한국역사를 일선동조론, 정체성론, 타율성론 등에 기반해 기술했다. 뉴라이트 역사학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은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위안부 피해자를 ‘매춘’ 등으로 표현한 ‘제국의 위안부’ 역시 마찬가지이다. 동북아 역사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한민족의 관점에서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한다.

김주언(전 한국기자협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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