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5월의 피멍은 언제 무엇으로 사그라질까... 올해 ‘들불상’ 수상 서지현 검사

[르포] 5월의 피멍은 언제 무엇으로 사그라질까... 올해 ‘들불상’ 수상 서지현 검사

  • 기자명 김건완 기자
  • 입력 2018.05.28 17:40
  • 수정 2018.05.29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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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현 검사, 5·18 등 역사적 순간마다 여성 성적 피해의 세월...묻혀진 진실 하루빨리 밝혀야
광주광역시 장애인체육회 근무 김동명씨, 알고 보니 들불야학 7인 열사 ‘김영철 열사’ 장남

[데일리스포츠한국 김건완 기자] "공포가 끝났던 5월 어느 날 화정동 아파트 베란다에서 느꼈던 시리도록 따사롭던 햇살은 여전히 온몸에 남겨져 있다“

"5월의 기억은 모두의 생명과 삶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해줬다“

창원지방검찰청 통영지청 서지현 검사가 한국사회에 '미투 운동'을 확산시킨 공로를 인정받아 광주에 있는 국립5·18민주묘지 역사의 문에서 들불상을 수상하며 남긴 소감이다.

서지현 검사가 제13회 들불상 수상 후 들불야학 7인 열사 가족과 함께 한 모습이다. (왼쪽 첫 번째 서지현 검사, 가운데 故 김영철 열사 장남 김동명씨, 세 번째 故 김영철 열사 부인 김순자 씨) <사진=김영철 열사 유가족 제공>
서지현 검사가 제13회 들불상 수상 후 들불야학 7인 열사 가족과 함께 한 모습이다. (왼쪽 첫 번째 서지현 검사, 가운데 故 김영철 열사 장남 김동명씨, 세 번째 故 김영철 열사 부인 김순자 씨) <사진=김영철 열사 유가족 제공>

◇ 서지현 검사, 5·18 등 역사적 순간마다 여성 성적 피해의 세월...묻혀진 진실 하루빨리 밝혀야

광주 태생으로 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서 검사는 "8살 어린 나이였지만 그 5월의 함성과 공포, 피와 눈물은 여전히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며 80년 5월의 기억을 떠올렸다.

이어 서 검사는 80년 5·18 당시 계엄군의 여성 성폭행 증언이 나온 것에 대해 "폭로하신 분께서 저를 언급하시면서 폭로를 하셔서 저로서는 굉장히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면서도 "저로 인해서 용기를 내셨다고 한다면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5·18 때도 그렇고 많은 역사적인 순간에서 여성들이 성적인 피해를 입었던 긴 세월이 있었다"며 "그런 부분이 규명이 돼 지금이라도 바뀔 수 있는 세상으로 나갔으면 한다. 그렇게 묻혀 졌던 진실들이 하루빨리 밝혀지고 가해자가 하루빨리 사죄하고 생존자가 회복됐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들불상은 518 민주화운동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들불야학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상이다. 이 상은 김영철, 신영일, 윤상원, 박용준, 박효선, 박관현, 박기순씨 등 들불야학 출신 열사 7명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 사회에서 민주 인권 평등 평화 발전에 헌신한 개인이나 단체를 시상하는 상이다.

그래서 '들불상'은 뜻 깊은 의미 있는 상이다. 올 해 수상자로 서지현 검사가 선정된 것은 그래서 더 의미 있게 다가온다. 대한민국 사회에 본격적으로 '미투 운동'을 촉발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 내 아버지는 ‘도청을 끝까지 사수한 5.18 시민군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김영철 열사’

올해로 13번째를 맞는 ‘들불상'은 사단법인 들불열사기념사업회가 주관한다. 들불야학을 설립해 운영하고 5·18민주화운동을 전후로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분투하다가 숨진 7명의 열사 유족들도 해마다 번갈아 가며 시상에 따른 여러 가지 행사를 돕는다.

올해는 도청을 끝까지 사수한 5.18 시민군 항쟁지도부 기획실장 김영철 열사 유족들이 앞장서 도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38주년이 된다. 김 열사의 장남인 김동명(43)씨는 광주장애인체육회에서 올곧은 성품으로 성실하게 근무하고 있다.

김씨는 19일 SBS ‘그것이 알고 싶다’ 방송에선 미국기밀문서에 의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의 지시로 80년 5월 17일 비상계엄령 발포와 동년 5월 27일 자정을 기해 계엄군 투입과 도청 함락 그리고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문서 등을 공개하는 방송을 보며 치밀어 오르는 울분을 애써 참았다고 한다.

이어 그는 “발포 명령 책임자 뿐 만 아니고 아직도 밝혀내지 못한 진실과 왜곡된 것들이 많이 남아 있다.”며 “그나마 5.18특별법이 제정돼 다행이지만 하루 빨리 문재인 정부가 진실과 실체를 풀어야 할 과제”라고 화해와 노여움의 두 갈래 속 깊은 한숨으로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김영철 열사는 1948년 전남 순천에 태어나 호남 명문인 광주서중과 광주일고를 졸업하지만 가난으로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공무원 시험을 합격했지만 군 미필이라는 이유로 국가직은 합격 취소되고 지방직으로 임용된다.

첫 발령지인 전남 승주군 별량면사무소에서 2년여 동안 근무하다 농협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보고 공무원 생활을 접은 후 곧바로 군에 입대 해 국방부 영문타자병으로 복무를 마친다.

군 제대 후 4년 동안 서울에서 신문팔이, 우산팔이, 청과물 장사 등 밑바닥 궂은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 때 김 열사는 밑바닥에서 일을 해보고 경험을 쌓아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갖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더불어 사는 공동체 삶을 살겠다고 마음을 깊게 다졌다 한다.

들불야학에서 레이크레이션 강사로 활동하는 모습 故김영철 열사(오른쪽 첫 번째) <사진=김영철 열사 유가족 제공>
들불야학에서 레이크레이션 강사로 활동하는 모습 故김영철 열사(오른쪽 첫 번째) <사진=김영철 열사 유가족 제공>

이후 열사는 서울 생활을 접고 7년 여 간 오누이처럼 지낸 지금의 김동명씨 어머니와의 결혼 승낙을 얻기 위해 전남 순천에 내려왔지만 결혼을 반대는 의외로 막강했다. 그가 고아인데다가 직장도 없이 변변치 않은 집 한 칸도 없었기에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는 싸리대문 앞에 무릎을 꿇고 꿈쩍도 않은 채 일주일 동안 버텨 결혼을 허락을 받는다.

원래 김 열사 집안도 괜찮은 편이었다. 일제 때 부친 고 김경묵씨는 순천에 자리한 안록산병원 의사였고, 모친 수간호사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여수, 순천 반란 사건과 연루돼 부친이 사형을 당해 김 열사 어머니가 삼형제를 데리고 목포로 피신했다. 이어 광주로 옮겨와 영신영아원에 총무로 취직했지만 병환으로 김 열사를 두고 일찍 떠난다.

결혼 후 김 열사에게 평소에 호감을 가진 광주 YWCA 조아라 회장과 광주영신영아원 서경자 원장님의 권유로 신협 지도자과정을 아내와 함께 수료해 신협 지도자 유치 등의 공로가 인정돼 광주YWCA 신협 참사로 근무하면서 광주 광천동 시민아파트 이사 오게 된다. 이리하여 광천동 천주교회 교리실을 하나를 임대해 쓰는데 그게 바로 유명한 당시 전남대 학생들이 주축이 된 노동야학인 ‘들불야학’이 탄생하게 된다.

이어 그는 70년대부터 광천동을 중심으로 새마을지도자, 빈민운동, 노동운동, 시민운동가로 활동했으며 김 열사를 중심으로 하는 ‘들불야학’에 윤상원, 박관현 열사 등이 함께 참여해 도시 빈민과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민주시민 양성에 온 정성을 쏟았다.

80년 5월 광주 5.18 민중항쟁 당시 도청에서 연설하는 故김영철 열사(가운데)의 모습<사진=김영철 열사 유가족 제공>
80년 5월 광주 5.18 민중항쟁 당시 도청에서 연설하는 故김영철 열사(가운데)의 모습<사진=김영철 열사 유가족 제공>

80년 5월 광주 5.18민중항쟁이 발생하자 대자보와 투사회보를 제작해 도청에서 항쟁지도부 기획실장을 맡아 현장의 선봉에서 항쟁을 전개하던 중 5월 27일 새벽 윤상원 열사와 함께 도청을 사수하다가 계엄군에게 체포돼 상무대 영창에서 심한 고문을 받는다.

혹여 5.18 광주민중항쟁이 간첩들 소행으로 몰아 신군부가 국민들에게 왜곡 선전할 것을 염려해, 수차례 자살을 기도하며 머리를 스스로 부딪쳤고 그 충격으로 인해 이후 그는 정신질환마저 얻게 된다.

신군부가 주도한 군 재판 1심에서 내란 수괴죄라는 명목으로 12년형을 선고 받아 광주교도소에 수감된다. 2년 뒤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지만 고문으로 심해진 정신이상으로 사회에 복귀도 못한 채 16여 년 동안 투병생활을 하다 1998년 8월 16일에 누구보다 의롭고 힘들었던 생을 마친다.

1998년 병원에서 故 김영철 열사의 마지막 모습 <사진=김영철 열사 유가족 제공>
1998년 병원에서 故 김영철 열사의 마지막 모습 <사진=김영철 열사 유가족 제공>

◇ 여태껏 힘들고 숨죽여 지내온 518 유가족들에 남아 버린 깊고도 쓰린 공통의 상처여서 더욱 그렇다.

정작 남은 유족들의 삶은 결코 순조롭지만 않았다. 가난은 수식어에 불과할 정도로 평생을 달고 다녔고 하루아침에 아버지가 ‘간첩, 빨갱이, 폭도’라며 온갖 핍박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장남 김동명씨는 조선대를 다니다 입대한 군 생활 중 중대장 서모씨로부터 ‘간첩자식, 폭도자식, 불순분자’라고 운운하며 따가운 멸시와 요주의 인물로 찍혀 힘든 군 생활을 겪어야만 했다.

이렇게 김 열사의 남겨진 처자식도 다른 열사와 별다름이 없었다. 특히 가난 속 설움, 주변으로부터 소외와 마음의 상처는 강한 트라우마 늪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여태껏 힘들고 숨죽여 지내온 518 유가족들에 남아 버린 깊고도 쓰린 공통의 상처여서 더욱 그렇다.

26일 들불상 시상식을 마친 후 김영철 열사의 장남 김동명씨는 “아버지의 이름으로도 작은 음악회, 장학재단이나 기념 사업회를 만들고 싶다”라고 감회를 말하며 “오는 6.13 지방 선거 후 지자체에서 예산을 확보해 꼭 만들어 주시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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