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과 해방정국에서 백범 김구선생의 족적을 지우면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는다. 그의 존재로 인해 우리는 독립운동사에서 자존을 찾고 분단사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다산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어느 정도 현실에 타협하면서 사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아들의 편지를 받고 다음과 같이 썼다. “천하에는 두 가지 큰 기준이 있는데, 옳고 그름의 기준이 그 하나요, 다른 하나는 이롭고 해로움에 관한 기준이다. 이 두 가지에서 네 단계의 큰 평등이 나온다. 옳음을 고수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가장 높은 단계이고, 둘째는 옳음을 고수하고도 해를 입는
대한제국을 병탄한 일제는 가혹한 무단통치를 통해 민족문화의 말살, 경제적 지배와 수탈로 한민족은 고사 상태에 빠졌다. 일제에 항거하는 의병ㆍ열사들이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일제의 폭압적인 탄압에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가들은 중국ㆍ만주ㆍ노령ㆍ미주 등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거나, 혹은 지하로 숨어서 비밀리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1918년 1월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원칙이 발표되었다.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구상은 연합국과 대결하였던 독일ㆍ오스트리아ㆍ터키 등에 속해있던 식민지에 적용하려던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 원
우리 독립운동의 무대는 중국ㆍ미국ㆍ러시아ㆍ프랑스 등 세계 각지에 이르렀다. 국제회의가 열리는 곳이면 대표를 참석시켜 독립의 기회를 얻고자 시도하였다.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는 가장 많은 대표가 참석하기도 했다.1917년 볼셰비키혁명에 성공한 러시아는 미국 등이 주도한 태평양회의에 맞대응하여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하는 극동민족대회(원동약소민족대회, 제1차 극동피압박인민대회, 근로자대회, 제1회 극동공산주의 단체 및 혁명단체대회로도 불렸다. 여기서는 극동민족대회로 표기한
해방의 날을 보지 못한 채 ‘그날이 오기만을’ 애타게 그리다가 젊어서 숨진 소설 ‘상록수’의 작가이자 독립운동가인 심훈의 ‘그날이 오면’에는 모든 항일운동가와 민중의 염원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이 목숨이 끊기기 전에 와주기만 할 양이면 나는 밤하늘에 나는 까마귀와 같이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올리오리다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마침내 그날이 왔다. 1910년 8월 29일 국치로부터 만 34
해방전후사에 대한 논쟁은 아직도 이념대결의 장으로 남아 있다. 일제 강점으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정을 거쳐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 한국전쟁에 이르기까지 질곡의 현대사는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 있다. 죄없는 양민이 이념갈등 속에서 목숨을 잃었다. 집권세력은 양민학살을 공산세력폭동 진압으로 왜곡했다. 그로부터 70여년이 지나면서 국가폭력에 대한 진상규명이 추진되고 있다. 국회에서 제주4.3특별법이 전면 개정된 데 이어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됐다. 이제야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의 길이 열린 것이다. 그러나 해방직후 미군정의 성격에 대한 논쟁
올해 3·1운동과 임시정부 100주년을 맞아 다양한 기념행사가 열렸다. 독립운동가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계기였다. 3·1운동의 밑그림을 기획한 것으로 밝혀져 새롭게 조명받은 인물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몽양 선생은 체육을 통한 민족정신 함양을 실천에 옮겼다. 그는 조선축구협회장이던 1935년 2월 중국 상하이로 원정을 떠나는 평양축구단 환송 기념강연회에서 열변을 토했다. “운동으로 건전한 신체와 정신을 만들고 경기를 통해 투쟁심을 길러야 한다.” 체육을 통해 청년에게 민족혼을 불러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몽양 선
[데일리스포츠한국 박상건 기자] 금주의 책 소식 가운데 '화제의 책' 코너에서는 으로 촘스키 MIT교수가 기득권에 실랄한 논평을 쏟아낸 '세계는 들끓는다', 밤과 집과 몸 그리고 일에 대해 평범하지만 감수성을 되찾아 살아가는 방법을 일러주는 여류작가 김혜련의 '밥하는 시간'을 선정했다. '새로 나온 책' 코에서는 북유럽의 소박하고 깊은 맛을 기술한 책, 아메리카 대륙발견부터 트럼프 행정부까지 다룬 책, 상하이에서 시작된 김구와 임시정부 뒤안길을 더듬어가는 책, 유튜브 '
약산 김원봉선생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지휘한 대표적 독립운동가이다. 약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과 마지막 국무위원, 광복군 부사령관을 지냈다. 약산에게는 당시 100만원(현재가치 320억원)이라는 최고의 현상금이 걸렸다. 백범 김구선생의 60만원 보다도 훨씬 높았다. 그만큼 일제는 그를 잡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약산은 해방직후 북쪽으로 가지 않고 남쪽으로 왔다. 역설적이게도 그를 체포하여 심문한 자는 한국인 경찰이었다. 친일 고문경찰로 악명이 높았던 노덕술에게 따귀를 맞은 약산은 사흘동안 울부짖었다.약산은